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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e Park Jan 05. 2024

3년차 스타트업 PM, 퇴사 후 여행하기

- 이탈리아 피렌체

입사할 때부터 노래를 불렀던 이탈리아를 2년 3개월 후 퇴사하고 다녀오게 된다^^ 스타텁의 현실이다... 장기휴가는 꿈도 못꿈ㅠ


주요 거점 도시는 3개였는데, 그중에서도 피렌체가 나에게는 가장 인상 깊었다.

그 이유는 여행 일기를 가져온 아래 글을 통해 차차 확인해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키운 도시 피렌체는 인본주의, 휴머니즘의 상징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도시다. 스토리를 알고 나니 피렌체에 홀라당 사랑에 빠져버렸다. 피렌체 여행을 준비하는 다른 이들도 나의 마음을 공감해 주길 바라며...


앰뷸런스와 무료 응급실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면 하루에 4~5번은 앰뷸런스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구시가지 정중앙 노른자 땅에 응급실이 있었기 때문이다(과거에는 응급실이었고, 지금은 응급 본부라고 함. 신고가 들어오면 구급대원들이 출발하는 곳)


응급본부에 걸린 그림

응급실 건물에는 까만 얼굴을 한 사람을 등에 업고 가는 조금은 해괴한 그림이 걸려있다. 업혀있는 사람은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전염력이 높은 흑사병을 모두가 기피하고, 땅에 묻으며 처리할 때, 피렌체의 응급실만큼은 병자를 책임지고 치료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그림이다.


실제로 피렌체에선  모든 응급 신고와 치료 비용은 도시에서 부담하고, 병자는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 응급실은 15세기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 도시는 아픈 사람은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구나,, 싶었다.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2500점의 작품은 그 어떤 것도 약탈하거나 훔쳐오지 않았다. 모든 작품은 메디치 가문이 제값을 주고 구매한 작품이거나 선물 받은 작품이다. 그래서 혹자는 우피치 미술관이 “가장 순수한 목적의 미술관”이라고 표현한다.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 부흥하기 시작해서 18세기에 쇠퇴했는데 마지막 혈통이 사망하면서 메디치 가문에서 수집해 왔던 모든 작품을 피렌체 시에 기증한다. 조건은 작품들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되지 않도록 하고, 이 작품을 통해 얻는 모든 수익은 피렌체 시민을 위해 쓰겠다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피렌체는 여행객들이 저녁 늦게까지 여행하는 몇 안 되는 유럽 도시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메디치 가문이 기증한 우피치 미술관 수익 및 여러 관광 수익이 도시의 치안과 위생 등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초에 우피치 미술관 입장료가 한번 올랐는데, 그 이유는 밀라노에서 발생했던 자연재해를 돕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인상한 입장료 수익은 모두 밀라노에 기부되었다. 피렌체에 국한되었던 인본주의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고 본다.


전율의 순간

우피치 미술관은 ㄷ자 형태라서 가운데 서있으면, 양쪽 건물 기둥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발흥지답게 기둥도 범상치 않다. 모든 기둥들을 음각으로 파놓고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천재들의 조각상을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건물이 제법 커서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새로운 조각상을 마주하게 되는데, 단언컨대 이 순간이 여행 중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이었다.


우피치 박물관 기둥에 있는 천재들

미술계의 거장 보티첼리, 라파엘로, 단테, 조토, 미켈란젤로가 있었고 그 외에도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귀도 다레초(계이름 만든 사람)와 르네상스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 조각계의 도나텔로, 회화계의 마사초, 건축계의 브루넬레스키까지..


우피치 미술관을 두르고 있는 모든 기둥에 가공할 만한 천재들이 끊이지 않고 등장했던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떤 사람이 나올까 기대하면서 걷는 것도 좋았는데, 놀라움이 쉬지 않고 이어져서 계속 소름이 돋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다 여기 있다니..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사람들을 일찍이 알아보고 기꺼이 후원했던 가문과 그들의 흔적이 모든 곳에 남아있는 도시는 그 자체로 낭만이었다.



단테의 신곡, 여기서 행복하라

동행하면서 친해진 지은언니가 알려준 썰이다. 이전 여행지에서 어떤 아주머니와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 아주머니께서 명언을 엄청 많이 남겼다고,, 여행은 사실 “여기서 행복하라”의 줄임말이라고.. 이 말을 전해 들었던 곳이 피렌체 야경이 보이는 미켈란젤로 언덕이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울컥했다. 이날 이후로 그 명언을 마음에 품고 다니고 있었다.


단테의 신곡은 피렌체 방언(차오, 본 조르노 등등)을 이탈리아 공용어로 확립한 계기가 되었던 책이다. 우리로 따지면 세종대왕인 격. 근데 단테가 이 기념비적인 저서를 쓰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시궁창이었던 시기였다. 작가이자 정치인이었던 그의 지역에서 정적들의 배척을 당해 내쫓겨서 죽을 때까지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도는데, 바로 그 종착지 없는 떠돌이 생활 도중 집필했던 책이기 때문이다.


단테 생가 벽에 있는 단테 조각상

집필 당시 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책이 이탈리아의 공용어를 탄생시키고, 본인이 이탈리아의 한 획을 그을 인물이 될 줄은.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았을 때, 그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결국 “현재”의 가치는 현재에 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현재의 의미를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지금 이 순간을 더 잘 추억하기 위해, 온전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하고 즐기는 것이다. 그래야 시간이 흘러 돌이켜봤을 때 지금 이 순간이 더 좋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하느라 “현재”를 낭비하는 나에게 무척이나 큰 울림이었다. “여기서 행복하라”라는 말이 마치 걱정은 접어두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현재를 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현재의 가치를 현재 판단할 수 없다고 전하는 단테의 이야기는 이 울림을 증폭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렌체는 미래를 살아가던 나에게,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억하는 피렌체의 여러 순간들을 남기며.. 이만


미켈란젤로 언덕 풍경과 티본스테이크



두오모와 세례당


에어비앤비 호스트 커플과 보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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