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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복덩맘 Nov 15. 2023

살만한 세상

아이를 낳고서는 대중교통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할 때는 장거리는 거의 다니지 않을뿐더러 가끔 나가는 가까운 거리는 유모차로, 유모차로 갈 수 없는 거리는 택시나 자가용을 주로 이용했다. 사실 운전이 미숙한 탓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만 대중교통은 아이를 안고서는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대부분의 지하철역은 유모차가 다니기엔 불편하고 아직 걷지 못하는 10킬로그램이 넘는 아이를 안고서는 지하철을 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용기였을까. 나의 친한 육아동지 언니들과 집과 30분 정도 떨어진 대형 몰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실 아기의 돌치레가 지속되어 일주일 내내 아이와 집에만 있었던 터라 몸이 근질근질했다. 나가서 정신을 환기시키고 싶지만 운전해서 갈 용기가 나질 안아 유모차를 끌고 대형몰을 가기로 했다. 갈 때는 택시, 올 때는 지하철을 타야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말이다. 몰에서 우리는 완전히 즐길 수만은 없는 엄마넷 아이넷의 모임을 가졌다. 사실은 몰에 도착하자마자 밖으로 나온 걸 후회했다는 것이 내 진실한 속마음일 것 같다. 아이는 유모차에서, 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음에 칭얼거렸다.


칭얼거리는 울음소리 덕에 멘탈이 나갈 즈음 빨리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서울의 지하철은 북적이기 마련이다. 저녁이 되기 전, 유모차를 밀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사실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기까지도 고난이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유모차 들고 하나씩 하나씩 계단 위에서 계단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목적지가 달라져 육아동지들과는 헤어지고 나와 아이 둘만 남았다. 사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한번 환승을 해야 하는 고비와 유모차와 아이와 함께 탈 공간이 되지 않아 지하철을 여러 번 보내다 보니 퇴근시간이 맞물려 점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살짝 났다. 진퇴양난이 딱 떠오르는 기분이랄까. 우는 아이를 내 품에 꼭 안고 아이의 짐이 실린 무거운 유모차를 내 앞에 두고 계속해서 혼잣말을 했다.

"미안해, 여기까지 데리고 나와서. 우리 금방 집에 가자. 알겠지? 조금만 참아줘" 아마도 아이를 통해 나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또다시 지하철을 타러 환승노선으로 가는 도중 내 앞에 가파른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펼쳐졌다. 품에 아이를 안고 무거운 유모차를 밀며 지하철을 타러 내려온 것을 후회해 보았자 너무 늦은 때였다. 그때 청년 한 분이 내게 와서 "죄송한데 유모차 제가 내려드릴게요."라고 말을 걸었다. 내가 그분을 올려보는 동시에 그분은 내 유모차를 계단아래로 후다닥 내려주었다. 계단아래에 보니 또 하나의 에스컬레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 그분은 "제가 여기까지만 한 번 더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라고 하시더니 또 한 번 나의 유모차와 짐을 들고 계단아래로 내려다 주시고는 꾸벅 인사를 하시고는 유유히 사라지셨다. 내게 잠시 천사가 왔다 갔나 보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글썽했지만 감동에 젖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아직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고 내게는 아이가 있었다. 환승 지하철 앞에서 또 한 번의 지하철을 보내고 겨우 유모차와 아이와 함께 탈 공간이 생겨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이 있는 역에 내렸다. 하마터면 그 많은 사람들에 끼여 내리지 못할 뻔했지만 "죄송한데 저 내릴게요." 한마디를 하니 홍해가 갈라지듯 모두 길을 비켰고 앞에 있는 또 다른 천사시민들이 내 유모차를 앞으로 잡아당겨서 빼주었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 위치까지 알려주시고는 유유히 사라지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이 보이는 순간 정말이지 울컥했다. 이제야 집이구나. 그리고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 집에서 뉴스만 틀고 볼 때는 매번 각박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울 시민들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지금쯤 나와 아이는 지하철 환승역에서 표류되어 있었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또 아이를 낳고 나니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인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마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일상에서 스쳐가듯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유모차 들어주신 이름 모를 청년분 정말 고맙습니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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