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가볍고 무거운 존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 (김춘수)
지금까지 삶은 내게 자애로운 편이었다. 원하는 바는 노력하면 대부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새삼 언어가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직장을 그만두고 두 달 동안 바짝 입시 학원을 다니다 통번역대학원 입학시험을 봤다. 전형료가 아까워서 원서는 한 군데만 넣었다. 그리고 합격했다. 2년 내내 성적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졸업시험도 한 번에 통과했다. 6개월 동안 원하던 프리랜서 활동을 하다가 교수님 추천으로 정부 기관에 인하우스 통역사로 들어갔다. 하지만 강아지가 없었다.
남편은 강아지를 받아들이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고 나는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나른한 주말 아침, 눈이 저절로 뜨였고 아침햇살과 함께 협탁 위에 고이 올려둔 반려견 관련 책 두 권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받아들일 자리를 다 마련해 두었는데 정작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게 되어 생겨버린 빈자리처럼 마음 한편에 바람이 슝슝 부는 것만 같았다.
내 모습이 짠했는지 오빠는 눈으로라도 강아지를 보고 오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투명한 유리상자가 가득한 곳에 도착했다. 연애 때도 한 번 스치듯 다녀간 곳이었다. 하지만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동물원도 갇혀있는 동물들이 불쌍해서 싫은 오빠 입장에서 여기만큼 야만적인 곳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달리 갈 수 있는 곳을 몰랐다.
발랄한 다른 아가들과 달리 녀석은 곤히 자고 있었다. 명찰에는 2개월 ‘벼리’라는 이름과 ‘대표님’이라고 쓰인 글씨가 보였다. 이곳 대표가 기르는 반려견이 직접 낳은 강아지라고 했다. 한번 교감해보라는 말에 그냥 보기만 하겠다고 거절했다. 강아지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더 군다가 ‘내 강아지’가 될 아이도 아닌데 괜히 사람 품에 따듯함을 알려주고 허탈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적극적인 직원분에 안내로 우리는 결국 소파에 앉았고 잠에 취해 어리둥절한 강아지는 내 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도 강아지는 강아지라는 것일까? 마냥 졸리고 소심해 보이던 강아지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금세 카드지갑 줄을 깨물며 놀기 시작했다.
작고, 귀엽고, 여린 강아지. 투명한 작은 유리 상자가 세상에 전부인 강아지. 강아지를 다시 직원분께 안겨드리고 발걸음을 떼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접은 상태였고 오빠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직은 반려 동물과 함께 지낼 생각이 없었다.
“오빠, 그래도 강아지 실제로 안아보니까 어땠어? 어떤 생각이 들었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한 번도 반려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오빠의 생각이 궁금했다. 앞으로 반려견과 함께하는 삶을 그려볼 수 있을지 염탐하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오빠 입에서 상상하지도 못한 한 마디가 불쑥 나왔다.
“음... 우리 강아지다?”
놀란 토끼처럼 눈이 커진 나를 애써 외면하며 오빠는 운전에 집중했다. 그냥 순간 그런 생각이 들은 것뿐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기쁘기보다는 덜컥 겁이 났다. 처음 안아본 벼리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또 두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아마도 생명의 무게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