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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Mar 01. 2023

삼월 첫날에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삼월에 하늘을 우러러본 적이 있던가? 유관순 누나는 내 모교 선배다. 나는 당당하게 시험 보고 이화여고에 들어간 마지막 세대이다. 독립운동의 주춧돌이 된 유관순 선배를, 어린 나이에 옥중에서 삶을 달리 한 그분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모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있다. 고등학교 삼 학년 무렵, 막 기념관이 설립된 해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예배를 보기도 하고, 기념관 안의 도서관에서 저녁 식사로 점심에 남긴 도시락을 친구와 먹기도 하고, 공부하다가 예술 공연이 있을 때, 몇몇 친구만 아는 비밀통로로, 몰래 공연을 훔쳐보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 그 통로는 없어졌을 것이다.    

  

  삼월은 내게 늘 낯설고 추웠다. 특히 새로 발령받은 학교의 삼월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난방 없는 교실은 추웠고 새로 만난 얼굴 익히랴, 무더기로 쌓인 업무 처리하랴 바빴고, 수업 계획에 눈코 뜰 새 없었다. 교감, 교장으로 올라갈수록 새 학년 계획과 책임에 삼월이면 건강이 무너졌었다. 서향에 현관 옆인 교실이 내가 담임한 교실이면 더없이 추웠다. 보약 한 첩을 먹어야 그 해를 버틸 수 있었다. 보안관이 없던 시절이라 교문에서 가까웠던 그 현관으로 외판원이 드나들었다. 은행 카드사 영업사원, 보험 영업사원부터 무좀약 파는 사람, 화장실이 급해 찾아온 사람까지 별별 사람들이 다 그 통로로 들어왔다. 날아온 먼지를 청소하느라, 일과가 하나 더 덤으로 생겼다. 삼월이면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다. 수업을 공개한 후에 학부모총회를 연다. 총회에는 학부모회 임원, 녹색어머니회, 급식 명예 교사, 도서 명예교사회 등을 뽑았다. 지금은 구청에서 교통지도할 사람을 지원해 주지만, 예전엔 자원봉사로 녹색어머니회에서 돌아가며 교통지도를 했었다. 할당된 인원을 채워야 하지만, 고학년 올라갈수록 참석한 어머니들이 적으니 교사들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일부러 학부모 임원을 맡는 게 부담스러워서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학부모도 있었다. 수업 공개하기 전 행사로 환경심사를 받았다. 주로 교장, 교감이 학교 전체를 돌면서 수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이 되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미술에 재능이 있는 교사나 손재주가 있으면 특출 나게 뒷 칠판을 잘 꾸며 놓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삼월 초부터 근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여러 환경이 삼월의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도 삼월을 버틸 힘이 있었다면 그건 아이들의 눈동자였을 것이다. 삼일절 계기 지도를 위해서 삼일절 노래를 지도했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민국 만세.”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스펀지처럼 따라오는 아이들의 우렁찬 노랫소리. 지금은 그때처럼 국경일 계기 지도를 잘하지 않는다. 워낙 교육과정이 세세하게 많아서일까?

  그때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들, 음악 시간에 <봄비>라는 노래를 지도할 때, 화음을 넣을 때, 리코더로 아름답게 연주할 때,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끼곤 했다.

  “솔솔 봄비가 내렸다 나무마다 손자국이 보이네. 아 어여쁜 초록 손자국. 누구, 누구 손길일까? 나는 알지. 아무도 몰래 어루만진 봄님의 손길. 솔솔 봄비가 내렸다 뜨락에는 발자국이 보이네 ~”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어, 텔레비전 소리도 듣기 싫어 조용한 방에 눕고 싶었다, 그렇지만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나의 가짜 생일로 근래 없이 카톡이 시끄러웠다. 할인해 주겠다는 홍보성 문자다. AI로부터 생일 축하 노래도 들었다. 호적을 이 개월 앞당겨 신고한 탓이다. 바야흐로 ‘지공선사’가 되었다. 네이버를 검색하니 ‘지공선사’란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요즘 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에 대한 지하철 예산 문제로 시끄러우니, 공연히 죄지은 기분이 든다. 주민등록상 65세 생일에 이렇게 송구한 마음이 들어서야.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우리네 삶에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퇴직한 후에 몇 개월 동안 집에서 꼼짝없이 칩거하면서, 사람 만나는 즐거움,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친구와의 시간, 여행하면서 만나는 친구들, 이런 기회와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만약에 집에서 은둔하며 평범했던 시간을 소처럼 되새김할 기회가 없었다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를 탓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가짜 생일을 맞은 오늘 삼월 첫째 날! 나는 ‘첫’이란 글자의 설렘을 기억하고, 귀중하게 여길 것이다. 이젠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살 것이다. 귀중한 목숨까지 희생하며 우리나라를 있게 한 조상들과 독립 만세를 외친 유관순 선배를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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