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선생님’이란 호칭이 자주 사용된다. 어르신이 나오는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 모두 다 ‘선생님’으로 부른다. 교통순경이 면허증을 보여달랄 때나 위반사항을 지적할 때도
“ 선생님은 속도위반하셨습니다. ”
자치센터에서도, 방문한 사람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쓴다. 온라인상에 만난 글 벗에게도 서로 예의상 ‘선생님’이라고 호칭한다. 마땅한 호칭이 없는 것인지, 적절한 호칭을 찾지 못한 건지 잘 모르겠다. 70년대에는 길을 가다가 ‘사장님’하고 부르면 거의 다 뒤를 돌아봤다는데, 요즘은 다 ‘선생님’이다.
며칠 전 길을 가다가 누가
“ 선생님! ”
하고 부르기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부른 게 아니었는데, 오랜 세월 ‘선생님’으로 불리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본 것이다. 혼자 멋쩍게 웃고 말았다.
몇 년 전 같은 학년을 했던 선생님들과 라오스 여행을 갔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5박 7일 여행 중에 선생님 티를 내면 벌금을 내기로 규칙을 정했다. 그런데 자주 벌금을 내는 사태가 발생했다. 호텔에 무엇을 두고 왔다고 다시 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 교실에 무얼 두고 왔어요. ”
라고 이야기하거나
누군가를 부를 때, '선생님'이란 호칭이 자연스레 나오기도 했다. 서로 그럴 때마다 큰 소리로 웃었다. 평생 가졌던 직업을 티를 내지 않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취직한 회사 사장님에게도 매번 ‘사장님’이란 소리가 나오질 않고 ‘선생님’ 소리가 반사적으로 나와서 민망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이란 호칭을 매일 썼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시절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을지로 계림극장의 신호등을 무시한 채 길을 건너시다가, 경찰에게 걸려 파출소까지 가게 되었다. 직업을 묻는 경찰에게 종이를 달라고 부탁하셨다. 선생님이란 소리를 하면, 선생님이 되어서 무단횡단하냐고 학생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냐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할 게 두려워서 조용히 그림으로 근무하는 곳을 알리려는 의도였다. 남산을 그리셨다고 한다. 실제 그 당시 남산 옆의 00 초등학교에 근무하셨다. 그림을 본 경찰이 갑자기 기립 경례를 붙이고
“선생님, 몰라 뵈었습니다. 어서 가던 길 가십시오.”
아버지가 더 놀라서 얼떨결에 파출소를 나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날 입으신 검은 가죽 잠바도 오해받는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막상 선생님이 되고 보니, 선생님 노릇이 쉽지 않았다. 첫 수업 장학이 있던 날이었다. 수업을 공개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몇 주 전부터 수업 준비를 철저히 했었다. 수업이 끝나고 협의회를 하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내게 한 수업 평가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이셨다.
“ 000 선생님은 교실 바닥은 닦지 않고, 자기 얼굴은 열심히 화장하고 다니네요. ”
교실 바닥이 문제였다. 그 당시엔 교실 바닥에 왁스 칠을 하고 걸레로 수천 번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다른 반 교실에 가면 학생들이 교실 바닥을 열심히 닦는 걸 봐왔다. 어떤 선생님은
“ 교실 바닥 몇 줄을 몇백 번 칠해! ”
이렇게 학생들에게 체벌 대신 명령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학생들에게 왁스 칠을 하게 하는지 궁금했고, 우리 반 학생에겐 절대로 그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 그것도 남자 교감 선생님께서 나의 화장에 대해 지적하실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도 교실 바닥과 비교해서 말이다. 자존심이 무너져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후로 결심한 게 있다. 내가 관리자가 되면
‘ 용모에 대해서 절대 침해하지 않고, 수업에 대한 평가만 순수하게 하겠다. ’
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했다.
교사 임용고시에 영어 면접관으로 십여 년간 일했었다. 여성 임용후보자들은 대부분 검정이나 회색의 정장 그리고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면접장에 나온다. 그런데 막상 합격하고 2월에 있는 신규교사 연수에 참석하는 복장이 상당히 대비된다. 짧은 미니스커트나 반바지에 긴 부츠를 신고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신규 시절 교감 선생님의 신랄했던 용모 지적 일화가 생각난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만능인 줄 안다. 신규교사일 때 체육수업 때의 일이다. 평균대 수업을 하는데 그 전날 수업을 준비하며 미리 평균대에서 연습했었다. 설명이 끝나고 학생들에게 평균대에 오르도록 지시했다. 갑자기 한 학생이
“ 선생님, 한 번 시범 보여주세요. ”
라고 부탁했다. 전날 연습도 했기에 자신만만하게 평균대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만 평균대에 올라가자마자 넘어지고 만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리고,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 뒤로 절대 ‘시범’은 사양한다.
딸아이가 놀이방에서 다쳤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황해서 병원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노란 체육복이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너무나 놀라 딸의 이름을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정작 딸은 차분하게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 중이었다. 놀이방 선생님 이야기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같은 놀이방 남자아이가 돌을 던져, 눈가와 이마가 찢어졌다고 했다. 싸운 건 아니고 서로 놀다가 그랬다고 한다. 놀이방 선생님이 급하게 종합병원으로 가서 꿰맨 게 평생 흉으로 지금까지 눈가에 상처가 남아있다. 그때 속이 상해서 상대방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 우리 아이가 그랬어요? ”
사과조차 하지 않고 이렇게 응대했다. 미안하다는 말만 들었어도 이렇게 서운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선생님’이라는 신분을 온 동네가 알기에 두 눈 질끈 감고 참았다.
‘선생님’이란 직업으로 거의 40년 살았다. 그 직업이 요구하는 게 많았다.
“ 선생님이 어떻게 그래? ”
“ 선생님이면 그래야지. ”
“ 선생 맞아? 그러고도 선생이야? ”
윤리적 잣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바둥거렸다. 그래도 나쁘게 살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이젠 긴장해서 살지는 않겠다. 살면서 힘을 빼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