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도시락을 먹어 본 일이 있나요
'서이초'선생님을 추모하며
서이초 사건으로 교육계가 들썩인다. 개혁의 움직임이 일시적 냄비 현상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교장, 교감이 교사의 민원에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가 커졌다. 또 교육 공무직에게 민원 대응이라는 새로운 업무가 생겼다고 그들이 단체로 그 업무에 관해 항의한다는 기사도 읽었다. ‘공교육이 멈춘 날’을 지정했다가 교육부와 갈등으로 교사의 연가를 철회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교장 재직시절 K 학생이 걸핏하면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질러 학급 학생과 분리했다. 게임 활동 중 지거나, 먹기 싫은 음식이 나오거나, 모르는 수학 문제가 나오면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여학생이다 보니, 여교감이 아이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 교장 어딨어? 교감을 이따위로 가르쳐? 왜 나를 데려가는데? ”
라고 소리쳤다. 방송실에서 아이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이 학생이 갑자기 자기 몸을 주먹으로 치는 게 아닌가?
“ 이거(상처를 보이며) 교장 선생님이 때려서 생긴 상처라고 집에다가 이야기할 거야. ”
그 학생의 분노조절 장애 문제로 학기 초만 되면 다른 학생의 학부모가 집단으로 교장실로 몰려왔다.
“ 얼른 특수학급이나, 특수학교로 보내주십시오. 다른 학생의 수업 침해가 심각합니다. ”
“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러다 아이들 집단으로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
그 학생을 어떻게든 변화시키려고 전문가와도, 아버지, 할머니와도 여러 차례 상담을 진행했다. 교육청에 지원을 요청했다. 심사해도, 특수학급조차 입급이 되질 않는다는 개별화위원회의 연락을 받았다. 그 아버지는 자신이 딸을 지도하기 힘들다고, 양육을 조부모에게 맡기고 있다고 했다. 그 학생의 인권도 수업권도 생각해야 하고, 역으로 다수의 반대 학생의 권리도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복잡했었다. 그 학생으로 인해 어떤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결심했다. 스트레스로 병이 생긴 담임교사도 있었다. 학년 올라갈 때마다 서로 담임을 맡지 않겠다고 그 학년을 희망하지 않았다. 결국 제비뽑기로 결정된 담임은 학교 업무와 학년 업무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학교 출석이 뜸해지는 시기여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민원이 없어졌다.
학교폭력이 일어났다고 신고를 받으면 즉시 순서에 따라 학교폭력대책위를 열어야 한다. 교감 시절, 학부모가 학교폭력을 신고한다고 교무실에 왔다. 매우 흥분된 상태여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학교폭력위원회를 열겠다는 다짐을 받고 학부모가 돌아갔다. 그런데 그 학급 학생들 이야기를 종합해서 들어보니 쌍방이 욕을 하고 서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게 드러났다. 그날 밤 수도 없는 학부모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인즉 학교폭력위원회를 열지 말아 달라는 전화였다. 학부모가 먼저 신고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는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 자체 종결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학교폭력위원회를 열게 되면 학생 상담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학생 상담 시간부터가 문제다. 쉬는 시간에 불러 상담하면 쉴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신고하고, 방과 후 상담하면 또 인권 문제로 다시 신고한다. 전담 기구를 열어, 학교 자체에서 해결이 되지 않을 사항이면 교육청으로 넘어가서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게 된다. 이 경우, 쌍방 변호사가 출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학부모가 결정에 불복하여 민, 형사 소송으로 가게 된다. 학교 내 전담 기구부터 교육청 학교폭력위원회까지 걸리는 시간과 에너지는 엄청나며 학교 구성원의 교육을 위축한다. 결국 민, 형사 소송까지 갈 거면 차라리 학교폭력 법을 없애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느 6학년 담임이 출근하면서 교문에서 서행으로 운전하는데, 갑자기 학생들이 장난하는 바람에 한 학생이 교사의 자동차에 받혔다.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 후 상황을 이야기하고 치료를 권하였다.
“ 선생님, 그럴 수도 있지요. 아이가 괜찮다고 하니 별일 없겠지요. ”
라는 답변에 너무나 안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6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부모가 그 교사를 뺑소니로 신고하였다. 경찰서를 들락거리고, 민사, 형사 소송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학교에서 수업 중 실험 실습을 하게 되면 의도하지 않게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다. 안전 지도를 사전에 하여도 잠깐 사이에 큰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또는 쉬는 시간에 아이들끼리 부딪히게 되어 치아가 부러지거나 이동수업을 하다가도 다치기도 한다. 보건교사가 수업에 들어가서, 그 시간에 위급환자가 생길 경우에도 초동대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 안전공제회에 비용지출 영수증을 제출해서 청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계속 학교나 담임교사에게 비용을 지출하도록 해서 결국 소송에 휘말리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교직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비용의 상당 부분을 치료비로 충당하는 경우를 보았다.
몇 년 전 동생과 주말에 콘서트를 보러 가게 되었다. 전에도 콘서트를 가면 스트레스를 풀었던 경험이 있어, 매우 신나는 마음으로 기대를 잔뜩 품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학부모 전화가 콘서트 직전에 왔다. 이 학부모 아이가 ADHD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이걸 인정하질 않아 전화를 끊질 않으니 콘서트고 뭐고 몇 시간을 통화해야만 했다.
“ 언니! 그렇게 학부모에게 절절매면서 전화를 받아야 해?”
보다 못한 동생이 툭 던진 한마디다. 결국 그 아이에 대한 내 판단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분이 전화를 끊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일인가? 자기 자녀 문제이다.
교직 생활 5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 5학년 담임을 맡았다. 첫 학교가 비교적 학생의 가정환경이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두 번째인 이 학교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많았다. 첫날 운동장 조회하는데, 핸드백을 교실에 두고 나와 살펴보니 현금이 모두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생의 소행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조심하지 않는 나의 불찰을 탓했다. 급식으로 나눠 준 우유를 학생들이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로 바꿔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반은 통합학급으로 특수학급 아이들이 다섯 명 정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천사처럼 착한 아이들이었다. 어린이날을 앞둔 어느 날 나는 회초리를 들었다. 학급경영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학급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폭력의 매를 선택한 것이다. 학급에서 가장 소란스럽거나 학급 분위기를 해치는 친구를 적어 내라고 쪽지를 돌렸다. 거기에 적힌 아이들 5명을 순서대로 골라 나오게 한 뒤에 종아리를 회초리로 세 대씩 때렸다. 지금 같으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어린이날이 다가오면서 학급 분위기가 소란한 것을, 아이들 탓으로 돌리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한 일이었다. 그날 밤늦게 집으로 전화가 왔다. 결혼 전이어서 친정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는데 내 방에서 전화 내용을 들으니 심상치 않았다. 한참을 듣던 아버지께서
“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교육청으로 전화하셔요. ”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내가 추측한 내용은 이렇다. 어린이날이 다가오는데, 이 학생의 아버지는 선물 사줄 형편이 되질 않았다. 마음이 좋질 않아 밤늦게 약주를 하시고 집에 와 잠자는 아이 종아리를 보니 빨갛게 줄이 가 있었던 거다.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늦은 밤이지만 학교로 전화를 걸고, 숙직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담임인 우리 집에 전화하게 된 것이다. 밤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였다.
‘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나 보다. ’
‘ 나는 교사가 적성에 맞질 않아. ’
‘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는 내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
‘ 왜 아이들에게 체벌해서 이런 원망을 들을까? ’
‘ 나는 참 형편없는 교사야. ’
내가 한심하고 못나 보였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아이들 얼굴 볼 일이 두려웠다. 방과 후 숙직했던 남자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편으론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그 당시는 체벌이 흔하게 이루어지곤 했다. 그날 어떻게 수업을 마치고 퇴근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그 학생이 어머님이 싸주셨다며 도시락을 내게 가져왔다. 영문을 모르는 내게, 그날 숙직했던 선생님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화번호를 알려준 게 마음에 걸린 그 선생님이 다음날 그 학부모께 그날 상황을 말씀드렸다고 한다. 매를 맞은 학생 중에는 반장도 있었고, 어머니가 육성회장인 학생도 있었다고. 그 학부모는 우리 애가 없는 형편에 차별을 당해 맞은 걸로 생각했던 거다. 오해를 풀게 된 어머니가 김치와 햄을 싸서 정성껏 도시락을 만들어 내게 보냈다. 지금도 그 덜 익은 김치와 햄의 맛을 기억한다.
그 친구 앞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너무나 맛있게 도시락을 먹었다. 내 평생에 가장 기쁜 마음으로 먹은 도시락이다. 펑펑 감사의 눈물을, 속울음을 쏟으면서 먹었던 도시락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매를 들었던 철부지 교사! 그 교사를 이해하고 품어준 학부모님! 매 맞고 행동을 교정해줘서 바르게 자란 그 친구! 모두 고맙고, 그때 그 일로 두고두고 내 교직 생활의 거울이 되어 반추하게 되었다. 그 고비를 넘겨서 거의 40년간 교직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교장으로 정년퇴직하게 되었다. 서이초 선생님이 작년도 학부모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매우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선생님을 잃어 정말 마음이 아프다. 조금이라도 ‘서이초’ 선생님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았더라면, 선생님을 기다리고 믿어주고 격려해주었다면 ‘서이초 사건’ 같은 비극이 일어나질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