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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름 Aug 19. 2019

각자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배우자가 좋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자

결혼 생활 6년 차. 우리 부부는 둘째를 낳을 때쯤이 되어서야 막장 연인 모드를 벗어났다. 대학교 CC(캠퍼스 커플)에 나이가 한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탓인지 우리는 몹시도 싸웠다. 간혹 남편과의 싸움은 내 삶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였다. 싸움은 격렬했고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사람이 됐다. 상대의 인생 상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공격했고 그러한 공격으로 자존심이 상할수록 다음 반격의 강도는 거세졌다. 


존경과 사랑이 없는 부부 관계에서 우리는 둘째를 낳기 전 ‘각자 조건 없이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자’는 지점 즈음에서 타협했다. 만난 지 10년, 결혼 5년 만에 ‘네가 잘해야만 나도 너에게 잘하겠다’는 조건부를 떼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거의 인류의 ‘불의 발견’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결혼생활이 순차 게임이 아닌 동시 게임임을 그때서야 알았다. 상대방이 잘할 때까지 기다리면 한없이 늦어지고 어긋난다. 아주 정밀하게 딱 같은 시각에 동시에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부부 관계에서 동시적 노력이 한없이 지속할 수는 없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다짐 다짐한 노력이 끊어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뱀 똬리처럼 벗어놓은 바지, 식탁 의자 바로 아래 놓인 양말, 예민하고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좀 더 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나의 노력을 시시각각 방해한다. 




둘째를 낳은 지 8일째를 맞이한 이틀 전, 나는 이제 우리 부부가 ‘동시적 자기 개선 노력’은 좋은 부부 관계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새 식구가 생기자 우리 부부 관계는 다시 흔들렸다. 동시적 노력은 너무 쉽게 위협받았다. 갑자기 늘어난 집안일과 육아 앞에서 남편도 나도 서로에게 화가 났고 실망했다. 또다시 장난감 자동차를 바닥에 밀며 놀고 있는 첫째 앞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크립 위에서 둘째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몇 분 동안 모유수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다. 결국 내 발걸음은 둘째에게 향했지만 ‘기꺼이 기쁘게’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였다. 나는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둘째에게 내 젖을 물렸다. 


각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남편과 관계만 놓고 볼 때 좋은 부모가 될 준비가 됐다고 자신하던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잠시지만 ‘우린 역시 안 되는 것일까?’ ‘성격차이가 너무 큰데,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생각을 오래 하다 보니 ‘이혼을 하는 게 정말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하는 결론이 잠시 고개를 들기도 했다. 나는 둘째를 바라보며 이혼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그렇게 포기할 때는 아니었다. 둘째를 낳은 후 커다란 스트레스 앞에서 이전의 나쁜 버릇이 한 번 더 튀어나온 것뿐이었다. 


결국  또다시 솔루션이 필요한 때였다. 각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동시적 노력이 동시에 깨져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항상은 아니라도 대체로 좋은 엄마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타협한 ‘동시적 유순함’은 각자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수유 의자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주던 나는 이 같은 솔루션에 ‘상호 관계’라는 상황이 너무나 결핍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부가 함께 살다 보면 부부가 아주 똑같은 이유로 힘든 상황은 드물다. 


현재 우리는 둘째 육아라는 상황에서 힘이 든 것이지만 그것을 뜯어보면 각자 힘든 이유는 다르다. 나는 <아직 아이를 낳고 거동이 불편한데 도와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남편의 경우엔 <밤에 아기를 보느라 잠이 모자란데 경제활동에 대한 부담도 있어서> 등이 각자 힘든 이유일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각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은 쉽게 꺾인다. 


그저께 밤 우리는 약 20~30분 정도 서로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내 경우 남편이 제대로 가사를 도와주지 않아 아직 산후조리 중인 내가 신경 쓸 것이 많아 힘들다는 것이 불만의 골자였고 남편은 자기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가 늘 불만이고 마치 하나도 돕지 않은 것처럼 말한 것이 불쾌하다는 입장이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이 부분에서 내 잘못이 컸음을 깨달았다. 나는 남편이 좋은 사람,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있지 않았다. 남편의 행동을 과장된 말투로 지적하기만 했다. 그가 좋은 사람,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쩌면 절반 정도는 내 책임이었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과 실천만으로는 부족했다. 우리는 평생 이기적으로 살던 배우자가 앞으로는 좋은 사람, 좋은 배우자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인성이 아주 글러먹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혼 후 배우자가 어떤 사람이 될 지에 대한 책임의 절반은 내게 있다고 봐야 한다. 결혼 전 생긴 상처가 있다면 보듬어 줘야 하고 모난 성격도 어루만져줘야 한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결혼 전 멀쩡해 보이던 상대방에게서 어느 정도는 '정말' 글러먹은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배우자의 가족사에서 왔든, 천성이든, 이제 절반 정도는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어쩌면 상대방에 대해 그런 다짐이 없다면 애초부터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특히 아이가 생긴 후 내 배우자가 어떤 부모가 될 것인지에 대한 나의 책임은 더욱 커진다. 아이가 없을 때는 내 배우자가 좋은 사람, 좋은 배우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편 혹은 고통이 내게 한정됐지만 이젠 아이들의 인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유롭게 각자 좋은 사람이 될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해진다. 결국 서로가 도와줄 수밖에 없다.  


이제 더 이상 ‘너의 성격은 네가 알아서 해라’, ‘너 성격 좀 고쳐먹어라’와 같은 주문과 바람은 어린아이처럼 이기적인 자세가 된다. 각자 좋은 부모, 배우자가 되기로 다짐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이 좋은 부모, 배우자가 되는 과정을 인내심을 갖고 돕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나의 경우엔 남편에게 짜증을 내거나 닦달하지 않겠다고 ‘결단’했다. 이전에 나는 ‘남편이 나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것을 고쳐야 해. 성격이 저래서 어떡해?’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젠 그런 주문과 바람만으로 상황을 개선하기엔 턱없이 시간이 없고 부족하다. 남편이 버럭 화를 내지 않도록 내가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지혜도 필요하다. 더 나아가선 남편이 버럭 화내는 버릇을 없애는 것도 내 책임이다.  


동시에 나도 남편이 내가 닦달하거나 짜증을 내는 엄마가 되지 않도록 도와준다면 이상적일 것 같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오늘 하기로 한 일은 오늘 안에 끝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못할 것 같은 일은 미리 나에게 알려주면 내 마음이 좀 더 편할 것 같다. 이렇게내 닦달하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남편도 노력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이 같은 결단을 하기 전에 부부 사이에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의 정의에 대한 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 될 지에 대해 내 책임이 있다는 내 주장에 상대방이 얼마나 동의할지 여부도 중요하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내 브런치 구독자 중 한 명인 남편의 생각이 궁금하다. 여보,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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