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非)완벽주의자와 결혼한 완벽주의자의 다짐.
나는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최소한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깔끔한 책상과 반듯이 정리된 서랍장, 늘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 있도록 채워진 냉장고, 늘 단정한 머리, 원만한 인간관계, 칼 같은 자기 관리.. 나는 이런 것들과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에 완벽주의는 내 사전에 있을 만한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3일 전까지는…
태어난 지 2주가 채 되지 않은 둘째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나는 어김없이 남편에게 잔소리를 했다. 남편이 더 일찍 유축해 냉장고에 넣어둔 모유를 신생아에게 주고 가장 신선한 모유를 첫째 먹으라고 줬다는 게 내 잔소리의 이유였다.
“도대체 매사에 일을 좀 정성껏 할 수 없어?”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터져 나오자 나조차 속으로 조금 놀랐다. 나는 마치 기대에 안 차는 자식을 나무라듯이 남편을 꾸짖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완벽주의’라는 낯선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당장 검색창에서 완벽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검색해 봤다.
이루기를 원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보다 완벽한 상태가 존재한다고 믿는 신념
Perfectionism, in psychology, is a personality trait characterized by a person's striving for flawlessness and setting high performance standards, accompanied by critical self-evaluations and concerns regarding others' evaluations. It is best conceptualized as a multidimensional characteristic.
<출처=위키피디아>
완벽주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완벽하지 못 한 상황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나는 그때서야 왜 내가 팀플레이를 그렇게 불안해 하고 내가 다른 팀원의 몫까지 하겠다고 자청했는지,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한 부분인데도 왜 그렇게 다 외워야 했는지, 아무도 그렇게 요구하지 않을 때도 화장실도 가지 못해 방광이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렸는지, 남편에게 왜 그렇게 항상 짜증이 났는지, 왜 생일에 비가 오면 외식을 아예 하지 않았는지, 왜 좋은 친구 무리 중 한 명이 거슬려 전부다 연락을 끊어버렸는지 알게 됐다. 완벽하지 못 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나와 같이 사는 남편은 비완벽주의자였다. 남편은 항상 ‘가성비’를 따지는 편이다. 그에겐 노력 대비 결과가 중요하다. 비용을 늘 고려한다. 비용 따윈 상관없이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려는 나와 남편은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내 눈에 남편은 늘 부족해 보였다. ‘왜 저만큼만 하지? 좀만 더 신경 쓰면 완성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그에 대한 내 짜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마 같은 팀원이었으면 벌써 팀이 붕괴됐을 것이다. 나는 저런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
나는 내 성장 과정에서 어떤 점이 나를 이토록 초조한 완벽주의자로 만들었는지 돌이켜봣다. 나는 노력했다는 사실 만으로 어른들에게 칭찬을 듣거나 인정 받지 못했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일화 중 하나는 할머니와 함께 송편을 빚던 날이다. 당시 나는 한 여덟 살쯤이었고 할머니와 다용도실에서 송편을 빚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금세 송편 빚기가 지겨워졌다. 나는 할머니께 “이제 그만 할래요”라며 손을 씻고 일어났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끝까지 안 할 거면 안 하느니만 못해”라고.
그 말씀은 어린 내게 적잖게 충격적이었다. 나는 나름 열심히 할머니를 도와드린다고 애썼는데 오히려 혼이 난 것이다. 어린아이가 할머니를 돕겠다며 나선 마음은 인정되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완벽주의자가 되었을까? 정확히 그때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시도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다.
반면 남편의 경우 칭찬에 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듯하다. 결과가 어떻든 열심히 했다면 충분히 칭찬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당장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완벽주의자인 내 입장에서 남편이 이뤘다는 성과들은 미약하게만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를 한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비완벽주의자인 남편의 진가는 중장기적으로 빛을 낸다. 남편은 내가 보기에 ‘미약한’ 성과에 절망하지 않고 ‘작은’ 노력을 꾸준하게 기울이면서 종국엔 절대 미약하지 않은 성과를 낸다. 성과가 미약하거나 자신이 없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아 결과물이 제로인 나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남편이 내게 주는 밥톨만 한 성과들에 대해 화를 낸다. 지금은 밥톨 같아도 모이면 분명히 커다란 무언가가 돼 있을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인내하고 기다리지 못해 싸움을 만든다. 당장은 꽤 괜찮은 성과를 낸 것 같아도 어느 부분에서는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시도조차 못하는 내 완벽주의보다 남편의 비완벽주의가 더 훌륭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나의 완벽주의는 남편을 완벽한 비완벽주의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남편이 아기 침대 주변에 늘어놓은 똥 묻은 아기 기저귀를 내가 조용히 치워주거나 “다음엔 쓰레기통에 버려주면 좋겠다”라고 조곤조곤 부탁하는 대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 일을 이렇게 더럽게 해야겠어?”라며 날카롭게 짜증을 낸다면 수면욕이 최우선이라는 남편이 눈 비비고 일어나 새벽에 아기를 돌봐주는 일을 멈출 수도 있다.
나는 아직 나의 완벽주의를 버릴 자신은 없다. 그리고 꽤나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하는 내 완벽주의에 대한 애정도 있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타인까지 완벽주의로 이끌려는 생각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도 어쩌면 더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나는 다짐했다. 최소한 짜증스러운 말투보다는 상냥하게, 명령보다 부탁으로 비완벽주의자인 남편과, 그리고 비완벽주의자일 수 있는 내 아이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완벽주의자가 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