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너무 매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요즘
취업해서 일을 시작하고 퇴사하기 전까지의 나의 인생은 사실 평탄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평범한 여자들이 밟는 평범한 길,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육아를 하는 평범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잔잔했던 나의 일상의 평범함에, 한순간에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 잔잔했던 나의 일상에 파문이 일어나다 못해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하나도 한 적이 없었고 누구와 싸우거나 분란을 일으키는 걸 싫어했던 내가 이제는 병원에 주기적으로 가야 하는 환자의 입장이 되고 나서부터, “을”의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어보고 싶거나 부당하게 느끼는 것들도, 나의 치료를 온전히 맡기고 있는 주치의 교수님 앞에서는 참기가 일쑤였다. 병원을 다니면서는 마치 내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가 계속 테스트하는 느낌이었다. 나도 집에 있으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응급실에 왔는데, 나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의료 기록상에서는) 중증인 환자인데, 병원에는 정말 상상도 못 하는 중증 환자들이 많아서 병원에만 가면, 내 병의 정도는 오히려 가벼운 정도에 속했다.
병원에는 나보다 정도가 심한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레 더 기다려야 되고 참아야 하는 상황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 안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인내심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병원에 다니다 보면, 이러다가 마치 도를 닦는 수행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사실 나는 나의 이 참는 성격 때문에 병이 났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병원에 다니는 입장이 되고 나서, 더 참아야 되는 상황들이 훨씬 많아졌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 정말 “인생은 내 맘같이 안 되는구나”라는 말에 실감하고 있다. 어차피 이렇게 내 맘같이 안 되는 것이라면, ‘병에 걸리기 전에 하고 싶은 거나 다 해볼 걸’이라는 후회도 수없이 해봤다. 그런데 이미 ’ 엎질러진 물‘인데 지금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암 진단을 받고 죽음이 예전보다 나에게 가깝게 있다는 체감을 한 뒤로 요즘 문득 내가 한때 많이 좋아했던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회사 일이 너무 힘들다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할 때마다 그 남자가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 “. 하지만, 예전보다 언제든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나는 그 남자의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암 진단을 받기 전의 내 인생이 인생의 “순한 맛”이었다면, 암 진단을 받고 난 뒤의 지금의 내 인생은 마치 인생의 “매운맛”을 제대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냥 매운맛도 모자라서 그 엄청 맵다는 “불닭볶음면” 맛의 인생이다. 나는 사실 환자가 되고 나서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 맛을 모르지만 추측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라면도 많이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맛있는 거라도 많이 먹어둘 걸 그랬다. 나는 아직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도 많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내 인생에 갑자기 끼어든, 불닭볶음면만큼 인생의 매운맛 때문에, 내 인생의 다른 즐거운 맛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