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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밍 May 27. 2019

김치녀, 그 경계에서

뼈 아픈 그 이름이여..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김치녀라는 말이 참 불쾌하다. 하지만 과연 그 단어로부터 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린 항상 김치녀와 비(非) 김치녀의 경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 혐오의 깊은 밑바탕이 되어버린 "김치녀". 


그녀는 연애 중..


김치녀라 함은, 일단 연애에 있어서도 동등하지도 주체적이지도 못한 여성에서 출발한다.  

데이트 비용은 의례 남자가 낸다. 뭐 가끔 커피값 정도는 낼 용의가 있다. 때가 되면 백도 받고 싶어 진다. 달마다 해마다 찾아오는 기념일엔 이 남자가 날 또 어떻게 기쁘게 해 줄까 기대한다.  

가만 보면, 받는 것에 참 많이 익숙해져 있다. 여자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방도 받아야 하고, 선물도 받아야 한다.   


데이트는 서로가 함께 즐기는 행위이다. 정서적인 교감이든 육체적인 교감이든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임해야 한다. 두 사람이 각각 연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기념일을 봐도 그렇다. 서로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뭔가를 해다 바쳐야 하는 날이 아니다. 뭘 받게 될지를 기대하지 말고, 당사자가 되어 뭘 할지, 뭘 준비할지,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해야 한다. 


몇 달을 돈을 모아 명품가방을 사다 안기는 남자 친구가 고마워서는 안 된다. 규모 없는 그의 소비에 화를 내야 한다. 몇 달을 돈을 모아 가방을 사다 안기는 게 제정신이라고 보는가? 


생각해보면 나도 김치녀가 아니었나 싶다. 데이트 때 아예 지갑은 두고 다녔다. 아니 뭐 일부러 빼놓은 건 아니었지만 우연히 집에 두고 온 적이 있었던 후로 반복됐던, 미필적 고의였다고 나 할까..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일이지만, 그때 그 데이트 상대들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무슨 자신감에,  무슨 배짱이었을까..



사실 우린 필요한 순간에 여성성을 한껏 드러내며 남성들과 구별 짓는다. 남녀평등을 늘 주장하면서 말이다. 

직장에서나 데이트에서나 불리한 순간이 찾아오면 우린 은연중 여성성을 무기로 삼는다. 그걸 누가 꼭 집어 얘기하면 발끈하면서 말이다. 


예전 다니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서 이동이 많아 사내 이사가 많았던 시절. PC를 뺏다 꽂았다 일이 좀 많은가..

다시 세팅을 하다 보니 에러가 나기 십상이고, '도움말'은 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읽어봐도 뭔 소리인지 감이 안 잡힌다. 아니 그 도움말을 읽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그래서 만만하고 친절한 남자 동료를 부른다. 

"김대리님~이것 좀 봐주세요~"


"남자분들만 좀 모여주세요"

옆 팀 여자 부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뭔 일인가 보니 대형 테이블을 옆 쪽 회의장으로 옮기나 보다. 

남자 동료들이 의례 그래 왔듯이 우르르 몰려갔다.  

"이것 좀 옮겨주세요~"

"이거 역차별이에요 부장님~"

몰려가던 무리 중 한 목소리가 들린다. 


정수기에 물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남자 동료를 불러 물통을 갈아 달라고 부탁했고, 부서 이동 중 옮겨야 하는 개인 짐을 좀 들어달라고 부탁하고는 나는 커피가 든 텀블러만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던 일, 컴퓨터 에러가 생길 때마다 도움말 읽기가 머리 아파 그저 김대리만 불러댔던 일. 

이제 좀 철이 든 나는 그 시절이 부끄럽다. 그 죄책감(?)에서 일까? 무턱대고 남녀평등을 들먹이는 저들이 좀 불편하다. 

남녀평등? 필요한 순간 어김없이 여성성을 무한 가동하면서?

차라리 남녀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정정당당해 보인다.  

결혼 후에도 "김치녀"는 존재한다.  

회사에 다니던 내내 적성에 맞지 않아하던 옆팀 00씨는 결혼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곤 남편의 월급을 본인이 관리하겠노라 선언했다 한다. 남편에겐 일정금액을 용돈을 주기로 했고, 친정 부모님께도 이제 용돈을 드리겠다고 했다.  


"오빠~ 월급 이제 내가 관리할게, 용돈으로 30만 원 주면 될까?"

"뭐...?"

"시댁에 용돈 보내드리면 친정에도 같은 금액으로 보내드렸으면 하는데.."

".."


덧붙여 명절에 각자의 부모님은 각자 챙기자고 선언했다고 한다. 

딱히 반박 못하는 남편을 보니 선제공격이 먹힌 듯싶다. 스스로 세상 쿨한 여자인 것 같다. 




십 수년 전, 갓 결혼을 한 친구가 분에 겨워 전화를 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야!”

“무슨 일인데?”

“신랑이 나 몰래 시어머니한테 용돈을 줬더라고?”

“그런데?”

“결혼 전에 계속 드렸었나 본데,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드렸었나 봐, 어제 시어머니랑 통화하는데 용돈 고맙다고 하시더라고, 나 몰래 엄마한테 드렸다가 딱 걸린 거지, 그래서 한바탕 했어”


결혼 전 꾸준히 어머니 용돈을 챙겨 왔던 신랑은 결혼 후에도 여느 때처럼 날짜에 맞춰 어머니께 용돈을 드렸다.  평소 때처럼 받으셨지만, 이제 결혼을 했고 아내가 생겼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며느리한테도 해야 할 것 같았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따로 전화를 챙겨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천지분간 못하던 며느리의 싸한 말투에 상처를 받으셨고, 아들한테 한소리 하셨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났었나 보다.

듣다 보니 어이가 없었던 나는,


“야, 정신 차려~ 자기 월급에서 자기 엄마 용돈 드린 게 뭐가 잘못된 거야? 니 남편이 더 어이없었겠다야”

“뭐?....”


사실 그 이후로 이 친구와는 연락이 끊겼다. 이제 좀 철이 들었을 라나..




김치녀, 그 어원(語源)으로 말할 거 같으면..


“김 과장, 우리 오늘 오래간만에 전골 어때?”

‘전골! 아.. 해장에 그만인데!,’


전골이 퍽이나 당겼던 오늘 점심. 하지만 점심값으로는 제법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고민 고민하다 그냥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뜨끈한 전골로 속풀이는 못했지만, 나쁘지 않은 구내식당 점심에 만족하며 돈 만원 아낀 게 뿌듯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밥을 먹고 있는 그 중간쯤. ‘띠리링’

‘모모 카페 17000원’ 카드 영수증이 도착했다. 


아내가 또 동네 아줌마들이랑 카페를 찾았나 보다. 속 부대낌 참아가며 아낀 "만원의 행복"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좀 아껴 썼으면 하는 마음을 조심스레 전해 본 적이 있지만 “내가 맛있는 거 먹는 그 돈이 그렇게 아까워?” 서러워하는 통에 이젠 입도 뻥긋하기 힘들다. 

동료들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여자들 그렇지 뭐..라고 한탄이 이어진다. 이 집 여자나 그 집 여자나 한국 여자들은 다 그렇구나 하는 말로 싸 잡아 귀결되다가, 그렇게 저렇게 김치녀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우리 집 근처 신도시에는 주부층을 겨냥한 브런치 카페가 성행하고 있다. 

아침 10시 반 오픈을 시작으로, 서넛으로 구성된 젊은 주부들이 한 팀 두 팀 식당으로 들어선다. 이곳저곳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 꽃을 피우고, 테이블마다 한 접시에 만 오천 원에서 2만 원이 넘는 유럽식 아침식사가 화려한 접시에 담겨 서빙된다. 여자들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아주 안성맞춤이다. 

사실 내용물은 토스트에 햄 몇 조각, 몇 가지 종류의 계란 요리들, 뭐 이런 것들이 전부이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가격에 비해 구성품이 상당히 부실하다. 


아이들 이야기, 시댁 이야기, 학교 이야기, 학원 이야기, 옆집 여자 이야기 등등 다양한 주제들로 두세 시간 혹은 아이들이 귀가하는 시간까지 쉴 새 없이 수다를 이어간다. 


쓸데없는 모임 아니냐는 남편의 핀잔에 한마디 했다.


"애들 키우는데 중요한 정보가 얼마나 많다고~!" 




나 역시도 아이를 처음 학교에 보내면서 신학기 모임을 핑계로, 정보공유를 핑계로 브런치 카페를 들락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감히 말할 수 있다. 득 보다 실이 열 중 아홉이라고.  

정말 정보 공유의 유익한 모임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우리도 알고 있다. 

미량의 "정보공유"라는 대의를 빙자해 결국 이 집 얘기, 저 집 얘기, 애들 비교, 남편 흉, 시댁 흉, 뭐 이런 시시콜콜한 소재들로 귀결된다는 것을. 집에 돌아와 몇 시간을 떠들어댄 그 모임을 기억하며 허무한 적은 없었는지 되짚어 볼 일이다. 

   

혹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아침부터 모여있는 여인네들의 "이 모임"을 꽤나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침부터 차려입고 카페에 앉아 있는 우리가 혹시 우아해 보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미안한 얘기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솔직해지기라도 하자, 수다나 떨며 스트레스 좀 풀어보자고 나왔다고...


허영인듯 허영아닌 허영같은.. 


몇 년 전, 브런치 식당을 오픈한 지인의 실언 아닌 실언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아침 열 시 만 되면 어디서 왔는지 아줌마들이 아주 줄지어 들어와요. 나야 돈 벌어 좋지만, 참 한심하죠. 남편들은 돈 버느라 고생인데, 여자들은 아침 댓바람부터 한 끼에 만원, 2만 원 하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으니.. “


내가 그전까지만 해도 가끔 찾았던 아침 모임을 딱 끊게 된 계기이다. 낯 뜨거워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에.. 

우린 우리의 허영과 가식을 직면해야 한다. 직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고쳐나가야 한다. 
김치녀는 여성들의 허영과 가식을  대놓고 비웃는 단어이다. 기분나쁘지만 부인할 수 없다. 




난 딸을 둘 키운다. 


아직 어려 내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차분히 차곡차곡 가르치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적극적이길, 감정을 당당하게 표현하기를..


연애이든 결혼이든, 폭력이 아닌 이상 피해자는 없다. 소유자도 소속된 자도 없다. 사줘야 하는 것도 받아야 하는 것도 없다. 그저 둘 모두가 당사자이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당당한 연애의 주체자가 되길 바란다.  


또한 허영에 사로잡혀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그렇게 김치녀의 굴레를 벗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by 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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