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예고도 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숙모가 던진 한마디에 다들 넋이 나갔다.
"동서, 왜?"
"애 아빠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코 고는 소리????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이혼을 하겠다고?
숙모가 제정신인가 싶었던 찰나,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서방님 코 고는 소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방이라도 좀 따로 써봐"
"제가 안 해봤겠어요? 옆방에서 문을 꼭꼭 닫고 있어도 그 소리가 장난이 아니에요! 온 집이 울린다고요"
학원을 나서던 길이라 더 듣지는 못했지만, 그날 숙모는 그 얘기로 하루 종일 울분을 터트리다 저녁 즈음에나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러곤 몇 년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터라,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통 알 수는 없지만, 그때 그 "이혼해야겠어요!"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코골이 때문에 이혼이라...
근데 사실 어떤 심정이셨을지는 일정 부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며칠 전 TV에서 방송된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보다, 불현듯 울컥했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 며느리가 거실에서 잠을 청했나 본데, 그걸 안 시어머니가
"천생배필은 코 고는 소리도 자장가로 들린대더라!"라는 말을 하신 게다. 아들 부부의 금슬을 걱정하신 마음에서 이셨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십여 년 전 나에게 닥쳤던 사건이 오버랩되며 단전에서부터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혼하고 삼사 년이 지난 후였던가, 한창 몸무게가 불어난 데다가 피곤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남편이 코골이를 심하게 한 적이 있었다.
사실, 난 가끔 거실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도 잠을 못 드는 예민 쟁이다. 그렇다 보니 밤새 귓가에 드르렁드르렁 울려대는 소리는 정말 고문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 시절 당장 이혼이라도 하겠다며 슬리퍼 차림으로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숙모가 다시 떠오른 것도 그즈음이었다.
첫 아이가 만 두 살쯤 되었을 때였던가, 안방에서 셋이 같이 잠을 자곤 했었는데, 남편의 코 고는 소리로 아이도 나도 잠을 설쳐댄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우리를 신경 쓰느라 엎드려 자다 옆으로 자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남편은 물론, 밤 새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치는 우리 모자까지 세 식구가 피폐해져 갈 무렵이었다. 그날도 울려대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과감히! 혼자! 일시적으로! 각방을 쓰기로 결정했다. (사실 "각방"이라고 명명하니 좀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긴 한다. 그저 잠 좀 자고 싶은 마음에 택한 "피신"이라고 보면 되겠다.)
피곤에 절어 정신없이 코를 골아대는 남편을 고이 놔두고, 비몽사몽간에 아이가 누워있는 요를 조심스레 끌어내 옆방으로 옮겼다. 그러곤 나 역시도 그 방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가 시어머니가 방문했을 때였다는 것이었다. 방송에 나온 저 부부처럼.
다음날 아침 서재방에 이불이 깔려 있는 걸 보신 어머님이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며느리, 이리 좀 와 봐라"
"네?"
"너네 각방 쓰나? "
"아 네, 저 사람이 코를 많이 골아서요, 저나 애나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그때 그 순간 하신 말씀이 정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 말씀이었다.
"천생배필이면 코 고는 소리도 자장가처럼 들린다고 하더라!"
"네가 먼저 잠들면 되지"
세상에... 방송을 보며 정말 '흠칫'했다.
잘 자야 할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한 이불 덮기'를 강요하지 말길..
인간에게 있어 수면권을 정말 중요하다. 충분하지 못한 수면은 삶의 질을 절대적으로 떨어뜨리며, 성격장애를 유발한다. 잠을 잘 잔 아이는 항상 해피하지만, 잠을 잘 못 잔 아이는 언제나 예민하고 공격적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잠은 윤택한 삶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 "잘 자야 하는 권리, 수면권"이 침해받게 되는 첫 계기가 바로 결혼이 아닐까 한다.
일단 두 사람이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하면서 수면의 질은 떨어진다.
불타는 사랑으로 교감이 넘친다 하더라도, 잠은 잠대로 잘 자야 하는데 말이다.
혼자 잠들고, 혼자 일어나던, 침해받지 않던 내 잠자리가, 결혼을 해 배우자와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또는 아내가 뒤척이는 움직임에 슬쩍슬쩍 잠에서 깨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새벽에 깨어 화장실을 다녀오는 서로의 행동 패턴에 아침까지 깊은 잠을 이어서 자기란 영 힘들어 보인다. 그래도 이런 조금의 불편함들은 세월이 쌓여가면서 적응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수면의 질을 방해하는 최고봉인 "코골이"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겪어보지 않은 자 말을 말길..
호텔에서 남편이 너무 심하게 코를 골 아대는 통에, 피할 곳이 없이 베개를 들고 화장실바닥에서 잠을 청했었다고 하면 혹시 짐작이 되실지...
지금은 그때 얘기를 하면서 같이 웃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고통 그 자체였다.
우린 젊은 부부들이나 나이 드신 어른들이나 "한 이불"에 너무 집착한다. 그리고 간섭한다.
싸워도 꼭 한 이불 덮고 자야 해,
부부는 한 이불 덮어야지,
한 이불 안 덮으면 그게 남이지 부부냐?
뭔가 따로 잠을 청하면 서로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다. 말도 못 하고 상황을 유지하다 불만만 쌓이는데 말이다.
물론 싸우고 난 뒤 각방을 쓰게 되면 화해의 기회조차 없어지는 면이 있다. 이때는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감정적인 불편함이 아닌, 사람의 기본권인 수면권을 방해하는 경우라면 필요에 따라 두 이불을 쓰는 게 왜 나쁜가?
사람은 기본권이 침해당하면 사나워진다. 불만도 쌓인다. 기본권이라는 게 사랑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 어쩌고 저쩌고 하며 한 이불을 고집해야 할까. 특히 그게 기본권 침해의 '가해자'라면 말이다. 제삼자라면 더더욱.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형태로 기본권이 침해된다.
나 같은 경우엔 워낙 잠자리에 예민하다 보니 '잘 자야 하는' 권리가 참 중요했다. 코 고는 남편을 슬쩍 피해 아이방으로 피신한 적도 많고, 소리가 심해진다 싶으면 짜증이 몰려와 남편을 흔들어 깨우기도 했다.
"자기 또 코 골잖아! 옆으로 좀 누워봐 봐!!"
요즘은 남편의 코골이가 상당 부분 개선되긴 했다. 사실 지금은 나의 지병(?)으로 인해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는 터라, 가끔 심해지는 남편의 코골이에도 더 이상 수면권을 침해받지 않는 슬프지만 평화로운 상황이 되었다. 잘 들리는 귀를 베개에 붙여 누우면 양쪽 귀를 다 막은 것 같은 고요함이 찾아온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