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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밍 Jun 05. 2019

<에세이> 어머니와 계란

토요일 새벽 5시,

잠결에 어렴풋이 인기척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잠에 빠져 업혀가도 모를 시간이었지만, 이 날은 이상하리만큼 눈이 번쩍 떠졌다.


“어머니~!”

이불을 번쩍 재치고 안방 문을 열고 나갔다.


“아이고, 와 깼노~ 피곤할텐데 들어가서 더 자라”

“아니요 어머니, 가시는 거 보려고요”

“아이고 마,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별스럽구로…드가 자라니까”

“잘 다녀오세요 어머니”

“그래그래 얼렁 가 자거라”

“네…”


현관문을 열고 닫으며 와락 들이닥친 찬 기운에 잠이 달아난 나는,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12월의 그 날, 

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저 한 켠에, 종종걸음으로 길을 나서는 어머님이 보였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그 좁은 길에 오늘은 눈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잔뜩 움츠린 어깨로, 행여나 미끄러질 새라 짧은 걸음을 내딛는 어머님을 보며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차 올랐다. 


매번 저런 길을 다니셨구나, 달빛 하나 의지해 아무도 없는 저 길을 저렇게 종종걸음으로 다니셨구나….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던 나는 어제 일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녁 퇴근길, 주말을 앞두고 잔뜩 설렌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들을 불러재꼈다.  

“우리 아들~~~!”   

이제 막 기기를 시작한 아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방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나는 서툰 솜씨로 기어 나오는 아들을 보자마자 구두를 냅다 벗어던지고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구아구 우리 아기 할머니랑 잘 놀았세요?”  

“네네 잘 놀았어요 엄마”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며느리의 구두를 정리하시던 어머니가 이내 아이 목소리로 맞장구쳐 주신다.  


“어머니~고생하셨죠”


그제야 어머니께 짧은 인사를 한 나는, 오늘 하루 아이가 잘 놀았는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질문을 쏟아냈다. 


“자알 놀고 자알 자고 자알 먹었어요~걱정 마세요~”


이제 막 엄마가 된 초짜 며느리를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푸근한 말투로 안심시켜 주셨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퇴근 인사를 마치고 난 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나와 어머니와 함께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반찬을 꺼내 상을 차리던 중, 그날따라 뒷베란다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오래된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새 냉장고가 생기면서 이미 쓸모가 없어져 버린, 한 칸짜리 작은 냉장고였다. 


찌든 때가 깊어져 구질구질해졌지만, 버리기엔 내심 아까웠던 터라 그저 양념류나 냄새나는 음식거리를 보관해 두고 있었다. 사실 어울리지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 쇳덩어리를 언제 내다 버리나 이제나저제나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마음이었던 걸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 낡은 냉장고를 벌컥 열었다.  


‘어..! 계란?’


각종 양념통들로 복잡한 냉장고 속 한 켠에 30구짜리 계란 한 판이 살짝 기울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놓여있었다. 


‘웬 계란이지? ’

“어머.. 니?”


고개를 돌리며 어머님을 부르려던 내 뒤엔 이미 잔뜩 당황한 표정의 어머니가 안절부절 못 하시며 서 계셨다. 


“어머니, 웬 계란이에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며느리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으신 어머님의 그때 그 이야기는, 이미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내겐 참 가슴이 아프다.  



출산 예정일을 20일이나 넘기고 응급 수술로 태어난 첫째는 유독 태열이 심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이야 막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빨갛고 못생길 수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사진에서 보던 백옥 같은 피부의 예쁜 아가를 기대하며 출산을 맞이한 초짜 엄마에게, 이 울긋불긋한 얼굴의 갓난아이는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집으로 아이를 데려온 후부터, 의사 선생님께 들었던 “시원하게 해줘야 하고, 유제품을 조심해야 해요”라는 그 말 외에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늦가을 싸늘한 공기에 아이가 추울 새라 자꾸 긴 내복으로 갈아 입히시는 어머님과 갈등했고,  어머님이 안 계신 사이 내복을 다 잘라 반팔 반바지로 만들어 버렸었다.  혹시 모유에 계란 성분이 섞여 나올까 걱정이 된 나머지 다른 식구들의 필요에는 상관없이 계란을 식탁에서 아예 치워버렸다. 


매주 주말 새벽 서울과 대구를 오가시며 손자와 시아버님을 보살피고 계셨던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집 앞 상가 앞을 지나다, 특가 판매라며 가득 쌓여있는 계란을 발견하셨다. 요즘 영 기운이 빠진 것 같으셨던 마음에 한 판 사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며느리가 아이 태열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아셨던 터라 그렇게 사 오신 계란 한 판이 괜스레 미안해지셨고,  고심 끝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이 냉장고에 어렵게 숨겨 두신 거였다.

 

“어머니….”  

“아는 안 준다~내 혼자만 몰래 먹을게”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나는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고만 하시는 어머니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어머니 이건 먹이지 마세요, 애 너무 덥게 싸 놓지 마세요, 매일 탕 목욕해야 좋대요~, 씻기고 나면 꼭 로션 듬뿍 발라주세요!”  


출산 전부터 온갖 육아서적을 섭렵하며 머릿속으로만 자신만만했던 나는, 아이를 맡기고 첫 출근을 하는 날 아침, 현관 앞에 서서 속사포처럼 이것저것 요구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책에서 본 온갖 조언들을 어설프게 쏟아놓는 멋모르던 며느리가 참 우습고 괘씸하다 싶으셨을 법도 한데, 삼 남매를 건강하게 키워놓으신 베테랑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었다. 그저 첫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하던 며느리의 열정으로 다 이해해주셨고, 제대로 된 식사 한번 챙기기 어려울 정도로 동분서주하시면서 그렇게 건강하고 예쁘게 키워주셨다.

 

그 뒤로 몇 년간 아이들을 돌봐주신 어머니는 손주들을 키워주시느라 주름이 한 층 깊어지셨다. 

멋모르고 설쳐대던 철없던 며느리는 이제야 그 주름이, 그 수고가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손에 자란 첫째와 둘째는 할머니를 유독 사랑한다. 할머니라면 만사를 제쳐둔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머니는 깊어진 주름을 이제 당신의 훈장으로 여기 신지 오래다. 


이젠 계란 프라이가 최고의 밥반찬이 된 아이들.

 

오늘도 저녁 찬거리를 위해 계란 한 판을 집어 든 나는, 낡고 찌든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복잡한 양념통들 사이로 조심스레 계란을 올려놓으셨을 어머님의 뒷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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