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가방 검사를 받던 날, 내 책상 위에는 학교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언제 가지고 놀다가 들어갔는지 모르는 탱탱볼, 무엇을 열었는지 모르는 열쇠, 클립, 지우개 따먹기 하다 많아진 지우개들, 한창 모으던 블링블링한 메모지들.
그것들로 인해 한차례 꾸지람을 듣던 기억. 쓸데없는 것은 집에 다 놓고 오라고 했던 선생님의 핀잔.
그땐 참 부끄러웠다. 다만, 정말 가지고 오지 말아야 하는 라이터라든가, 칼이라든가, 본드라든가, 그런 유해 목록이 없었던 것이 그렇게 핀잔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시절 초등학생이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 할 유해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라이터, 칼, 본드, 담배, 그런 물건을 가지고 다닐 초등학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방 검사라는 명목으로 나는 그때 사생활 침해를 경험했다.
늘 가방을 들고 다녔지만, 가방은 나였고, 가방이 나를 끌고 다닌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로 가방은 더 무거워져서, 수능 전날에는 가방 끈이 툭 끊어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하필, 운도 없이, 하루만 더 버티면 되는데, 가방은 기다려주지 않고, 생을 놓듯 끊어져 버렸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가 아이의 입학식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안타까운 일처럼.
나는 가방을 혹사시켰던 것 같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온 적 없는 목록이 많았는데도, 나는 가방을 가볍게 해주지 못했다. 나는 당황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순간, 필요한 물건이 없을까 봐. 그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녔다.
사람 관계에서도 그랬다. 주고받은 쪽지나 편지를 버리지 못했다. 사소한 알림 쪽지에도 그 사람의 필체가 적혀있었고 그 작은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주렁주렁 마음들을 끌고 다녔다. 한 번 만난 관계가 소중해서 버리지 못했다. 후에 '의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곤 했던. 관계에서 믿음을 중요시했다. 한번 인연이 되면 큰일이 없는 한 끝까지 간다는 믿음. 화가 날 수 있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내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상대방도 그러길 요구하고. 그런 믿음이 관계를 무겁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비단, 그것은 나만의 관계였던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박소란 시인의 <사고> 시를 읽고 나자, 가방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 시는 사람을 가방에 비유하고 있다. 우연히, 바닥에서 발견하게 된 죽음의 순간 하나,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으로 가방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가방은 어떤 눈을 보게 된 것일까? 동정, 연민, 놀람. 가방은 태연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말한다.
화자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점차 무거워졌을 가방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큰 일을 앞두고 돌아누운 이의 뒷모습처럼. 수능 하루를 남기고 끊어져 버렸던 나의 가방처럼. 사춘기 딸의 가장 혼란스러운 순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나의 엄마처럼. 사고는 그렇게 갑자기 일상을 파고드는 것. 사고뿐만이 아니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죽음도 언제가 마지막 날일지 가늠할 수 없다. 나는 엄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이 시처럼 바라보니 엄마도 사고처럼 떠난 것 같았다. 말기암으로 1년간 투병하다 떠난 엄마였지만, 엄마의 죽음은 내게 사고 같았다. 갑자기 찾아온 바이러스 같은. 모든 죽음은 갑자기 일어난다. 아무리 준비해도 소용없게 한다. 갑자기 소중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게 된다. 엄마의 마지막 눈빛을 잊지 못한다. 간암으로 누렇게 황달이 올라온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와 엄마의 마지막 인사였다. 이 시의 화자는 그런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와 상관없는 관계였더라도 화자는 그 순간 나와 상관있는 죽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점차 무거워진 가방에는 필요한 것이 담겨있지 않은 것 같다. 무엇을 담고 다니느라 그렇게 무거워지기만 했던 걸까? 명예, 권력, 부, 걱정, 욕심, 불안, 허영, 이기심, 질투, 부러움, 열등감, 수치심 등. 가방 속에 수없이 담았던 것이 정작 죽음의 순간에서는 꺼내 쓸 것이 없다. 필요할 것 같아 버리지 못했던 것들은 한순간 잡동사니가 되어 버렸다.
화자는 가방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담담하게.
누구나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문 앞에서. 가방의 끈이 툭 끊어지듯 가방은 쓸모를 다 하고 떠나 버린다. 가방에게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담는 부분이겠지만, 정작 끈이 떨어지면 멀쩡해도 들고 다닐 수 없다. 어딘가 부러지고 고장 나서 더 이상 가방으로 살 수 없는 순간이. 신도 막을 수 없는 순간이, 갑자기, 온다.
이것저것 담느라 무거워진 가방을 바라본다. 가방을 하루 종일 들고 다니다 보면 온전한 무게를 감각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무게처럼 느껴지는 것은, 너무 피곤한 날은 손에 든 모든 것을 어딘가 훌훌 버려 버리고 싶다. 떠나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 손에 들린 무게 하나를 덜어내면 발걸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사람은 참 단순해서, 아주 살짝 줄어든 무게로 또 걸음을 옮긴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싶은 극단적인 순간에, 단순한 나를 떠올린다.
고작, 작은 무게 하나를 버리면, 숨이 쉬어지고 걸음이 걸어지는, 그 단순한 나를, 어떻게 연민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 나는 그렇게 아주 작은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오늘, 가방의 무게를 달아보며. 나를 위해, 아주 작은 무게 하나를 덜어 본다.
사고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또, 생각하고 궁리함이라는 뜻도 있다.
길에서 우연히 목도한 사고 현장을 보고 화자는 오래도록 가슴을 쓸어내리고, 뒤돌아보며, 생의 가벼움과 죽음의 무거움을 오랫동안 사고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