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함께(2)
세례 / 정현우
잠자리 날개를 잘랐다.
장롱이 기울어졌다.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나는 본 적 없는 장면을 슬퍼했다.
산파가 어머니의 몸을 가르고
아버지가 나를 안았을 때,
땅 속에 심은 개가
흰 수국으로 필 때,
인간은
기형의 바닷바람,
얼음나무 숲을 쓰러뜨려도
그칠 수 없는 눈물이
갈비뼈에 진주알로 박혀 있다는 생각
그것을 꺼내고 싶다는 생각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의 절반은
전염병에 눈이 없어진 불구로 가득했다.
창밖 자목련이 바람을 비틀고
빛이 들지 않는 미래
사랑에 눈이 먼 누나들은
서로의 눈곱을 떼어주고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귓속에 붙은 천사들을 창밖으로 털었다.
-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게 된 사연이 생각났다. 치매 어머니를 간병하는 딸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도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간병을 했었다고 했다. 아버지를 보내고 어머니도 치매를 얻었다. 결혼도 포기하고 딸은 어머니 간병에 매달리며,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 겪어보니 이제야 알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간병할 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싶어, 그 힘듦의 깊이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딸. 그 딸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어머니를 헤아리며 어머니를 아이처럼 돌보는 마음이 보석처럼 빛나는 걸 느꼈다. 나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을 떠올렸고, 슬픔 속에 매몰되지 않고 희망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슬프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왜 슬픈 거지? 태어날 때부터 슬픔을 뼈마디에 새기고 태어나는 걸까? 힘든 일은 왜 반복되고 슬픔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전승되는지. 아기가 태어날 때 '응애', 하며 태어나는 것은 예정된 슬픔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사람은 언젠가 죽고 그만큼 또 사람은 태어나고. 슬픔 뒤에는 행복이 찾아오고. 또다시 슬픔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미래. 그것이 삶이라는 생각.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슬픈 존재라는 생각. 나의 잠시 잠깐의 행복도 누군가가 대신 지불한 슬픔의 대가라는 생각. 행복할 때 터져버리는 눈물처럼.
정현우 시인의 <세례> 시를 읽으며, 나는 근원적인 슬픔을 떠올렸다. 슬픔의 순간 신은 사라진 것 같고. 잠시 잠깐 슬픔을 잊으면서 사랑을 하고. 그러면서 다시 살아가고. 슬픔을 딛으며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정확히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해 보았다. 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해라는 표현은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 시는 창비에서 출판된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시집 제일 처음에 수록되어 있다. 여러 번 읽으며 탄탄한 이미지의 연쇄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