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고시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던 2021년 1월 13일 쓴 '토끼 감옥'이다. 논술과 달리 키워드, 문제에 대한 감상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형태였던 작문 과제로 쓴 글이다. 실무수습 때문에 노트북 이곳저곳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추운 겨울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던 움집 속 토끼들 사진이 생각 나 이곳에도 옮겨 둔다. 익명의 토끼 1인칭 시점으로 쓴 글인데(나 혼자 '익토'라는 이름을 지어줬었다), 최근 본 영화의 주인공과 익토 사이 닮은 구석이 있기도 하다. 기자 준비에 온 힘을 다 했던 과거의 나도 떠오른다. 그렇다면 익토는 참 많은 사람들과 닮아 있다. 사진 출처는 한겨레 "송도 센트럴파크에 '토끼 감옥'이? 8년째 섬에 갇힌 토끼들" https://www.hani.co.kr/arti/animalpeople/companion_animal/978238.html
토끼 감옥
몹시 추운 날이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나를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는 여러 쌍의 눈이 보였다. 비좁은 움막 안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짧은 목을 되는대로 숙여 내 몸을 확인했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색깔만 조금씩 다를 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움막 안에서 며칠을 보낸 후 겨우 발을 떼 밖으로 나오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하늘은 높았고 내가 발 디디고 있는 땅을 둘러싼 물은 깊고 넓었다. 풀밭에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존재들이 먹을 것을 찾는 듯 땅을 긁고 다녔다. 하루 일과는 땅에 코를 박고 먹이를 찾는 것이 다였다.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었고 계절이 바뀔수록 친구와 가족들이 늘어났다.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움막이고 그 밖이고 할 것 없이 그들로 꽉 차 있었다. 푸른 색이었던 잔디는 민낯을 드러냈다. 입은 늘어가는데 풀은 사라지자 이전에 친구,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생존 전쟁이 시작되었고, 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간수 없는 감옥일 뿐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년의 동산인 것 같았던 이 곳은 살아서는 절대 떠날 수 없는 종신의 교도소였다. 이 곳을 둘러싼 망망대해가 그 증거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감옥에 갇힌 것이다. 자유인 줄 알았던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그 즈음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그 애들이 며칠 수영 연습을 하더니 어느날 물에 뛰어들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중 몇몇은 물에서 죽었고, 몇몇은 건너편 땅에 닿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고도 했다.
이 비좁은 땅을 벗어나고 싶어한 것은 그 용감한 이들만이 아니었다. 다들 땅에 코를 박고 종일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줄 알았는데, 탈출을 위해 지하 통로를 파고 있었던 거였다. 땅이 너무 울퉁불퉁해진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서로 다른 깊이의 구멍이 이 섬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탈출을 상상하며 물을 내려다 볼 때 수면 아래에서 힘 없이 쓸려 온 친구를 본 것도 같았다. 온몸의 털이 바짝 섰다.
다시 겨울이 되자 망망대해는 빙판이 되었다. 흰 땅처럼 보였다. 건너편 육지까지 얼음이 연결된 것은 4년 삶에서 올해가 처음이었다. 용기를 냈다.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다. 수많은 밤을 뛰었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길지 모르겠지만 이건 내 삶을 건 마지막 몸부림, 탈옥이다.
지쳐 쓰러진 채 빙판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며칠만에 햇빛이 내리쬐자 얼음이 얇아진 게 느껴졌다. 건너편 땅과 가까운 쪽은 얼음이 녹기 시작했나 보다. 순간 이상한 것을 보았다. 내 몸집보다 족히 10배는 커보이는 검은 존재들이 나무 판자를 타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엄마가 어릴 때 가끔 풀과 마실 물을 주러 왔다던 거인들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믿지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다가와 나를 집어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내가 떠나온 섬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감옥에서 태어났는지, 나를 왜 다시 가두는지 묻고 싶었으나 기력이 없었다. 축 늘어진 채 내려다본 물 속, 얇은 얼음장 아래 친구들의 형체가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