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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 Dec 03. 2020

지상낙원 하와이에서 죽는다면

"Notice of Chapter 11 Bankruptcy Case"


미국에서 편지가 왔다. 이렇게 종이 편지가 온 건 거의 5년 만이다. 잊지 않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는 일. 잊을 만하니까 또 편지가 왔나 보다.



"언니 속 괜찮아? 나 이제 끝났어. 얼른 가자."


빨간색 카마로에 시동을 거는 운전석의 작은 아이. 친동생은 아니고 친한 동생이다. 하와이에 온 둘째 날이었다. 그리고 스쿠버 다이빙 클래스 첫날이었다. 예약한 업체를 찾아가고 몸에 맞는 슈트를 찾아 입고 산소통을 메고 웨이트 벨트를 차는 순간까지도 나는 내가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몰랐던 것 같다. 기어이 바닷물에 몸을 던졌지만 다이빙 포인트까지도 다다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마주하자 그제야 알았다.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지 말이다.


나는 물을 무서워했지만 하와이에 가기로 정한 뒤부터 일대일 강사까지 구해서 급하게 수영을 배웠다. 여행지를 하와이로 정하게 된 데에도 스쿠버 다이빙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물과 친해지기라도 했어야 했다. 함께 가기로 한 동생이 먼저 제안하긴 했지만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이라는 건 어느새 나에게도 갖고 싶은 것이 되어 있었다. 찾아보니 수영을 못해도 스쿠버 다이빙은 할 수 있다고들 했다.(그거 써놓은 사람들 다 찾아내서...ㅈ) 어쨌든 출국일은 다가오고 나는 여전히 물은 무서우면서도 간신히 배영으로 25m를 가볼 수 있었다.


맥스였던가. 스쿠버 다이빙 강사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어쨌든 맥스로 하자. 맥스는 나의 뒷덜미를 잡고 헤엄쳐서 다이빙 포인트로 데려갔다. 뭔가 잘못 걸렸다는 표정이길래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수영을 못하는 내 몸이 파도에 밀려 계속 해안가로 도로 떠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땐 힘이라도 빼자 싶어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저 그가 나를 쥐고 끄는 대로 내버려 뒀다. 다이빙 포인트까지 수영이라니 내 시나리오에 없던 내용이었다.


이제 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맥스가 말했다. 치약을 발랐던 마스크를 쓰라고 시켰다. 이게 정말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잘 보이긴 할까? 의심이 짙었지만 썼다. 그리고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사전 교육 때 배운 감압을 어찌어찌 기억해서 했더니 나는 물속 바닥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서웠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몸이 떠올랐고 맥스가 붙들어 내렸다. 이것만 수십 번 반복했다. 여기까진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PADI라는 자격증을 따려면 그렇게 내려와 물속에서 착용한 마스크, 웨이트 벨트 등 모든 장비를 벗고 다시 입는 걸 할 수 있어야 했다.


난 포기했다. 어지러움과 함께 극심한 메슥거림을 겪었다. 저 안에 있다가 물에서 나온 것도 기적이었는데 이제 다시 들어가서 뭘 한다고? 나는 맥스에게 오늘 이 과정을 패스해도 내일 배를 타고 나가는 다이빙 포인트에 갈 수 있는지 물었다. 갈 수 있다고 했다. 뭐 배만 타도 된다는 건지, 자격증은 못 따지만 다이빙은 할 수 있다는 건지 어지러워서 영어가 더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 같이 간 동생은 당연히(?) 다시 들어간다고 했다. 수영도 잘했고 애초에 이건 내가 아니라 그녀의 도전과제였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좀 전에 끝났다며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숙소로 운전을 시작한 그 아이의 옆모습을 본 것 같은데 지금 시간이 몇 시지. 나는 너무 토할 거 같고 어지럽고. 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지?


빠-악!!!


태어나서 처음 듣는 굉음이었다. 빡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소리. 죽기 전엔 다신 못 들을 정도의 폭발음이었다. 눈을 떠보니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차가 돌고 있었다. 정말 영화 촬영 기법이 대단한 거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차가 스핀 할 때 주인공 시점에서 그렇게 촬영한 것이었다!


"......"


무슨 말을 했었을까. 소리를 질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차가 멈췄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내 자리에 에어백이 앞면과 옆면까지 다 터져 있었다. 차 안은 흰 연기가 자욱했다. 본능적으로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아주 큰 발신음이 울리며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소리가 차 안에서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 것처럼 크게 흘러나왔다. 이윽고 영어로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였던가, ' 나 나갈래'였던가 - 에어백이 터져서인지 - 내 쪽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운전석의 그 아이에게 소리쳤다. 그 아이가 운전석에서 내리고 난 뒤 운전석을 밟고 불길을 피하듯 뛰쳐나갔다. 그리곤 도로에 바로 누워버렸다. 너무 아팠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그냥 온몸이 다 아팠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주변의 모든 차들은 멈춰 선 것 같았다. 다들 해를 가려 나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외국인들에겐 오래전부터 숙지된 응급상황의 매뉴얼인지 나에게 이름과 사는 나라를 몇 번이고 대답해줬는데도 계속 물어봤다. 아마도 내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나 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단 우리가 탄 차는 좌회전을 하려고 했었고 - 그게 좌회전이 가능한 곳이었는지 아닌지도 알 수는 없지만 - 맞은편에서 빠르게 달려오던 차와 충돌한 것이었다. 카마로가 세 바퀴 회전할 만큼의 충돌이었으니 큰 사고였다. 앰뷸런스에 누워 몇 가지 인적사항을 묻고 기록하던 스태프에게 차는 어떻게 됐냐고 했더니 사진을 보여주었다. 조수석 뒤쪽 모서리에 충돌하여 대각선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었는데, 사진 속 차는 트렁크와 뒷좌석은 아예 없어져 반절이 형체가 없었다. 내 쪽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은 그쪽으로 거의 다 밀고 들어와 문이 휘어졌기 때문인 듯했다.


30년 넘게 살면서 입원도 깁스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 내가 죽을 뻔했다. 우리가 탄 차, 정확히는 내가 조수석에 있던 차가 조금만 느렸거나 상대 차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수석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였다. 바로 나에게 말이다. 상대 차는 브랜드는 정확하지 않지만 지프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차종이었다. 뒤에 잔뜩 짐을 실을 수 있는 작은 트럭과 같은 차. 아무리 사이드 에어백이 터졌다지만 그 차의 방향이 뒤쪽 모서리가 아니라 조수석 문을 향했다면 나는 지금 살아 있을까? 


쉐보레 카마로의 위엄은 그렇게 차가 반파됐지만 나를 살려줬고, 충돌하여 에어백이 다 터지고 난 후에는 자동으로 내장된 카폰이 911 신고까지 한 것이다. 경찰차 몇 대와 앰뷸런스가 왔고 나는 들것으로 옮겨져 머리까지 움직이지 않게 고정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우이의 아주 작고 작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 뒤는 더욱더 대환장 파티다. 사고가 난 건 찰나였지만 2020년의 내가 아직도 영어로 된 편지를 받고 있으니 이게 환장이지 뭔가. 이때 차 사고로 난 많은 걸 깨닫고 배웠다. 그리고 내 삶 자체가 많이 바뀌었음을 항상 느끼며 산다.




덧. 2부를 쓸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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