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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 Nov 28. 2020

달리기 한번 해보세요

평생 동반자와의 만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요?"


그래, 정말 오랜만이었다. 알고만 지내던 남자사람한테서 메시 온 것이다. 이런 락 중 열에 하나쯤은 본인 결혼 소식을 - 썸도 뭣도 아닌 나에게 굳이 - 알려는 것이지만 나머지 아홉은  찔러보기다. 하아, 얼마나 심심하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에게까지 순번이 돌아온 걸까. 이 사람은 미혼이며, 여자친구도 없었던 것 같으니 각이 바로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


일단 반갑게 안부를 되물어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보면 '주말에 할 게 딱히 없어요'처럼 에둘러서 나오거나 '요즘 누구 만나요?'처럼 돌직구로 들어오는 멘트가 있다. 이 멘트의 본질은 '나 좀 만나보지 않을래?' 같지만 황당하게도 '나 좀 누구 소개해줘'였다는 식으로 상대의 빠른 태세 전환이 가능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자, 그럼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혹시 운동 뭐 하세요?... 혹시 달리기 해보셨어요?... 러닝 한 번 해보세요."


1:1 채팅 상담 연결이라도 된 것처럼 술술 전개되는 나만의 러닝 소개 및 연결 프로세스의 시작이다. 한 번도 안 뛰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뛴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만들어가며 열심히 말을 이어간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러닝'을 하라! 는 동기 부여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아주 정확하고 상세한 안내가 뒤따라야 한다. 상대의 연령과 사는 지역 등을 고려하여 어디에서 어떻게 러닝 활동을 시작하면 좋을지를 맞춤 추천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러닝 동호회 커뮤니티로 진단(?)되면 카페명과 주소를 알려주고 주 활동 회원들의 나이대, 각 모임의 지역별 분위기, 커플 성사 확률 및 결혼 골인 사례까지 상세히 소개한다. 30대 초중반 정도로 나보다 어린 분들에게는 인스타그램 러닝 크루 계정을 복붙해주고 스포츠 브랜드의 러닝 섹션까지 안내한다. 유명한 런예인까지 덧붙여주면 한동안 말이 없다. 성공이다!


죄송하지만 나에 관심 끄시고, 혹은 난 소개해줄 사람이 없으니 어서 저 넓은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 안내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문도 모르고 갑작스레 시작된 나의 러닝 소개에 홀려 달리기 시작한 지인들이 꽤 된다. 실제로 달리면서 좋은 인연을 만난 분들도 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달리기에 온 에너지를 쏟게 되어 심심할 틈이 없어진 분들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모든 고객에게 흡족한 상담이었던 것이 아닐까.




사주팔자 봐준 모든 분들이 날더러 서른셋에 결혼을 한다고 했었다. 믿었다. 재미로 보러 간다는 게 쌓이고 쌓여 한두 명도 아니고 열댓 명은 족히 되는 역술인들이 '서른셋'을 입을 모아 말하니까 신기했다. 그래서 앞에 벌어질 일처럼 철석같이 믿었다. 그저 서른셋이 되면 갑자기 어디선가 '내가 네 남편감이야!' 하고 인연이 나타나서 그 사람과 남들처럼 적당히 연애하당연히 결혼할 줄 알았다. 그래, 과거형이다.


른둘에 정말 우연히 가입하게 된 러닝 동호회. '아, 나 여기서 만나게 되가 봐? (씨익)' 하면서 열심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서른셋, 서른넷, 서른다섯... (그 뒤는 더 이상 세지 말자) 그리고 지금까지! 설마 그 사주팔자 봐준 분들이 말한 '서른셋' 결혼은 설마 달리기와 한다는 거였나. 나는 그 뒤로 한 동호회에서 8년째 달리기'만' 하고 있다. 물론 이 모임에서 연애 한번 못해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모두가 좋은 페이스 메이커였을 뿐 아직 결혼이라는 거대한 미션까지 함께할 사람은 찾지 못했다.


러닝과 결혼이라니 '어이가 없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심심한 중생들에게 러닝을 전파하는 이유가 뭐겠나. 정말 달리기는 삶의 동반자로 비유되어도 부족함이 없다. 책을 읽을 때 나와 책만 오롯이 남겨지듯이 달리기를 할 때도 오직 '나'와 '달리는 나'만 남는다. 산책이나 등산으로는 만날 수 없는 '달리는 나'. 참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숨 가쁘지만 기분 좋은 친구다.


나만을 오롯이 마주하게 해주는 시간을 주는 '달리는 나'. 그 순간에는 오직 나와 그 친구뿐이다. 내가 달리기만 시작하면 '달리는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언제든, 기쁠 때든 슬플 때든 항상 나타나 나를 환영해주고 나를 북돋워준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달리는 나'가 함께 달린 곳은 절대 잊히지도 않는다.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여행지는 더욱 러닝이 하고 싶어 진다.


첫사랑을 추억하는 것보다 이젠 첫 러닝, 첫 10km, 첫 하프, 첫 풀 마라톤을 떠올리는 게 더 두근거린다. 그때 얼마나 추웠더라? 그 대회에는 참 사람이 많았어! 거긴 오르막이 참 심했지? 나와 '달리는 나'는 결국 한 사람이니 옛 추억에 잠길 때 다른 연인들처럼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음에 실망하며 싸울 일도 없다. 이쯤 되니 나 정말 러닝이랑 정말 결혼할 기세인 것 같다. 하하!


꼭 달려보시라. 완전한 나와의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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