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하나씩은 무언가를 쓰겠다고 정한 후부터 신기하게도 눈앞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회사에 다니지만 꼭 이사나 이직을 한 것처럼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진다. 출퇴근길도 처음 가보는 길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며 걷게 되고, 별다를 바 없는 일상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본다. 뭘 써야 할까 걱정하다 보니 찾아온 변화지만 멀리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고 돈 한 푼 쓴 것도 아닌데 얻게 된 오묘한 즐거움이라 일단 좋다.
또 뭐가 달라졌을까 생각해보니 몇 가지 더 있다. 먼저, 모든 책을 '전투적으로' 보게 됐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는 자소서 단골 레퍼토리의 진짜진짜 주인공이었던 나는 출판사 입사까지 하고 말았다. 매일 인터넷 서점 사이트 들어가 보는 게 진짜진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된 걸까 한번씩 웃기도 한다. 더 놀라운 일은 십년 넘게 보는데도 제목이나 표지, 카피가 좋은 책은 그냥 넘길 수가 없다. 그중 절반은 속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고 싶어서 속아서 산다.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 잡은 적이 없다. 그렇게 쌓아둔 책을 드디어 요즘 -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 쓰기 위해서 본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이 작가는 어떻게 썼나' 나름 분석하고 '그럼 나는 어떻게 써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아웃풋을 내려니 인풋이 필요해져버린 상황이다.
또 하나는 메모를 하게 된다. 오랜만에 펜을 쥐고 종이에 무언가를 '문장으로' 쓴다. 밥을 먹다가 빨래를 널다가 무언가 - 황당하고 어이 없는 -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전에는 혼자 피식 하고 흘려보냈을 사소한 것들도 까먹기 전에 얼른 적어둔다. 아, 그래 이걸 써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주 기발하고 멋진 생각은 메모가 불가능할 때 가장 많이 찾아온다. 특히 머리를 감을 때는 정말 수백, 수천 가지가 마구 튀어오르는데 욕실 문을 나서면 다 까먹는다. 세상을 바꾸진 못해도 내 삶은 바꿨을 만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수없이 있었다. 그저 유레카 외치며 알몸으로 뛰어나갈 급은 아니었을 거라고 위로해본다. 메모에 글씨가 괴발개발 되는 건 덤이다.
OOO님은 글 안 쓰세요?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해버린 게 민망하고 부끄러워 갑자기 상대에게 역으로 권해본다. '제가 대단해서 쓰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더 잘 쓰실 겁니다'를 압축해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대개 지인들도 출판사에 다니고 있거나 다녔던 사람들이다 보니 돌아오는 답이 예전의 내 생각과 같다. '나까지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라고. 지금도 격하게 공감한다. 물론 좋은 글을 쓰는 분들도 있지만 - 작가를 꿈꾸는 분들, 이미 책을 내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 세상에는 글 같지 않은 글, 책 같지 않은 책도 너무 많다. 출판사 이름이 '나무야미안해', '개나소나'라는 곳도 있다든데 참 잘 지었다 싶다.
대학 동기 중에 하나가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어느 날 요즘 학생들이 독립출판에 관심이 많다며 나에게 강의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독립출판이라니? 최근 책을 내는 일조차 유행처럼 번져 독립출판으로 누구나 책을 낸다. 그런데 사실 이게 예전의 자비출판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제돈 내고 책 만든다 하는 건 매한가지인데 '나는 좀 달라'를 혼자 외치며 자존심 세우기 좋게 독립출판이라는 말로 포장한 것 아닌가. 그렇게 만든 책들을 받아 모아놓은 독립서점은 마이너한 감성과 비주류의 트렌드를 대변하는 곳으로 시대를 앞서 나가는 문화인이라면 다녀야 하는 요즘 시대의 '살롱'을 자처하는 것 같다.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독립출판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왜냐면 나는 애초에 자비출판을 돈만 있으면 '개나소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그 누구도 '나만의 쓰레기를 만들겠어!' 하면서 글을 쓰고 책을 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욱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모든 글쓰기가 대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나도 쓰듯이 누구나 쓸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이 한 권의 책이 될 가치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덧.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꼭 몇 명은 '제가 언젠가 책을 내고 싶거든요' 한다. 그럼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럼 원고 써오세요. 내드릴게요!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써온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책 한 권 분량 쓰기는 어렵다.
덧2. 투고 원고는 항상 넘친다. 다들 자신의 원고가 지금까지 나온 책 중에는 없다고, 유일무이 하다고 한다. 10년 넘게 일하면서 본 바로는 그런 투고 원고는 정말 일 년에 한두 개뿐이다. 출판사는 이전에 나온 책들과 90% 비슷한 원고를 조금 다른 10% 컨셉을 잡아 책을 만든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 작가가 인간이라면 편집자는 신이라고 하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