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1일,
우리 사귀는 거야? 응, 사귀는 거야
글쓰기를 내 장기라고 생각하며 술술 써내려갔던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였다.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안 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칭찬도 받고 상도 받아서 철석같이 내가 글을 정말 잘 쓰는 줄 알았다. 책이 좋고 글도 잘 쓰니까 전공은 당연히 국어국문학과라고 생각하며 대학에 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여기 모인 친구들이 모두 나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말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알 리 없던 작가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수많은 글을 읽어나갈 때마다 나라는 존재는 점점 작아져서 원자화되었다. 결국엔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만 봐도 손가락이 마비되었고 내가 쓰는 글자 하나하나가 벌거벗은 알몸처럼 한없이 부끄러워져서 한 페이지짜리 간단한 레포트조차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 썼다. 감정이 널을 뛰던 이십 대였다. 매일같이 내 감정에 압도당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너무 좋아서, 화가 날 때는 너무 화가 나서 그 모든 감정을 밖으로 폭발시켰다. 이대로 가다간 사달이 나겠구나 싶어서 어떻게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비밀글을 썼다. 목구멍에 막혀 있는 휴지 뭉치 같은 걸 어디에든 쏟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글도 아니라 거의 혼잣말과 끄적임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렇게 내 폭풍같은 감정들을 비밀글에 쑤셔 넣으면서 얼마나 더 살아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고 평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쯤 다시 비밀글이 아니라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 그래. 한 마흔쯤이 아닐까?
웃음만 나온다. 이제 모레도 아니고 내일이 그 '한 마흔쯤'이다. 영영 나에겐 오지 않을 것 같은 진짜 어른의 나이라 생각했던 마흔이 고작 3개월이 남았다. 글쓰기가 두려워지고 거의 이십 년이 흘렀다. 끝내 나는 국어국문학을 심화전공까지 했지만 엄격한 자기검열로 이야기창작 관련 수업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고, 광고홍보학을 복수전공하여 바닥으로 추락하는 자신감을 간신히 붙들며 졸업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 뒤로는 비밀글조차 쓰지 않게 되었다. 그만 써야지 하고 정한 것도 아니고 감정 기복이 나아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회사 생활이 나를 글쓰는 행위조차 힘들게 해서 감정 표현을 못 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 더 이상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를 포기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약속한 시간이 왔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 오면 철도 좀 들고 인생 경험도 엄청 풍부해져서 글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했던 거였는데. 어쩌지. 전혀 괜찮지 않다. 아직도 나는 폭풍같은 감정의 노예고 여전히 내가 쓰는 글자들은 알몸이다. 괜찮을까. 모르겠다. 그렇지만 일단 쓴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던데, 됐고. 나 자신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를 모르겠으니 사는 이야기라도 써서 남겨야겠다. 컨셉 없다. 주제 없다. 목차 없다. 그냥 쓴다. 하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두시탈출 컬투쇼' 레전드 사연감이다, 인생이 시트콤이다 같은 말을 숱하게 들었다. 정말 단 하루도 맹물처럼 밍밍하게 흘려보낸 적이 없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버라이어티했다. 달고 쓰고 짜고 시고를 넘어 오미자 맛, 오미자 같은 삶.
초년운(?)이 좋지 않았기에 찾아온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과의 [20년 전쟁], 여중, 여고, 여대를 거쳐 십년 넘게 여초 직장을 다니며 겪어낸 [200번 미팅·소개팅의 살아있는 역사], 천진난만하게 국어국문학을 선택했던 것과 같은 또 한 번의 인생 최대의 실수 [출판계 10년 분투기], 경기도민의 20년 통학·통근 어드벤처 [2만 시간* 길에서 살아남기], 체육 '미', 체력장 '5등급' 출신의 [나의 소울운동을 찾아서], '82년생 김지영'의 동갑내기로서 82년생 미혼 여성의 남일 같지 않은 이야기 [82년생 권두리] 등 누군가를 만나면 펼쳐놓았던 나의 이야깃거리를 비밀글이 아니라 '공개'로 써보려고 한다. 재미없으면 어쩌지? 모르겠다. 그냥 고-
* 19년 ×300일 ×왕복 4시간 = 22,800(이만이천팔백)시간. 정확히 계산하니 곧 2만 5천 시간이 되겠다. 말콤 아저씨도 두 번 울고 가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