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컬처 Sep 15. 2023

잠옷과 가족

2020. 4. 13.

시작은 빛 바랜 군청색 잠옷이었다. 보드랍게 감기는 느낌에 자꾸만 손이 갔던 로봇 무늬의 잠옷. 


언젠가 엄마가 지나가듯 이거 입어보라고 한벌 줬던 걸 매일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잠옷은 부드럽다 못해 흐물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투명한 엉덩이를 가지게 된 나는 엄마에게 그 잠옷 산 데에 가서 다시 사와보라고 했지만 엄마는 기억이 안난다 했다. 그 촉감을 잃을 수 없던 지독한 나는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원래의 색이 아닌 오트밀 빛깔의 로봇무늬 잠옷을 찾아내 남편과 나의 몫으로 두 벌을 구입했다. 


그리고 깨끗이 빨아입는다며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잠옷을 건조기에 넣게 되었고, 야속하게도 잠옷은 장렬히 전사했다.


우린 줄어든 옷을 입은 서로를 보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이거 어떻게 산 건데! 이제 어떻게 할 거냐며 생각없이 왜 건조기에 돌렸냐고 자조섞인 핀잔도 했다. 

그럼에도 잠옷은 줄어든 주제에 너무 편했고 막내동생 옷 뺏은 모양으로 우린 그냥 그렇게 입었다.


엄마아빠가 똑같은 옷만 입는 모양을 보고 첫째는 '나도 로봇 잠옷' 노래를 고래고래 불렀지만 아이 잠옷으로 만든 건 영 찾기 어려웠다. 슬슬 포기할 무렵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내 앞에 딱 찾은 아이꺼 로봇 잠옷. 그렇게 첫째 것 하나, 둘째 것 하나를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내 잠옷과 똑같은 꽃무늬 실내복도 있길래 첫째를 위해 하나 더 골랐다. 건조기에 호되게 당했으니 사이즈는 크게. 


그렇게 우리 가족의 완전체 잠옷이 탄생했다. 온 가족 첫 커플룩이 잠옷이라니 이게 왠말이야.


하지만 모두 다같이 똑같은 잠옷을 입을 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평일에 남편은 애들 잔 후에 들어오고, 코로나 때문인지 한동안 않던 주말출근에 갑작스러운 밤샘호출까지, 얼굴 보기가 영 힘들었다.


공교롭게도 마침 어제는 비록 긴급보육이었지만 첫째는 처음으로 유치원에, 둘째는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등원한 날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또다른 일상을 준비하는 첫날을 마친 후, 우리는 모두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드디어 다같이 같은 잠옷을 개시했다. 아빠랑 같이 입겠다고 꽁꽁 아껴둔 잠옷을 꺼내고 첫째는 폴짝폴짝 뛰었다.


별 거 아닌 똑같은 잠옷 네 벌을 같이 입으니 무슨 슈퍼영웅이 된 것 마냥 마음이 씩씩하고 든든하다.

복직 3주 전. 마음을 다시 이렇게 다잡는다. 


우리 넷 모두 건조기에 잘못돌린 잠옷처럼 쫄지 말기를. 


우리는 이렇게 가족이 되어간다.



2020. 4. 13. 

매거진의 이전글 메신저가 메시지의 삶을 살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