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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돌씨 May 17. 2022

교수님, 저는 이 길이 안 맞나 봐요

: 편입한 지 1년. 학과장 교수님을 찾아가 꺼낸 첫 마디

"고학력 저임금인 일자리가 수두룩한데 미술사는 뭐하러 배우게!"


 첫 전공수업에서 교수님께 들었던 충격적인 말을 시작으로, 사회과학계열인 행정학을 배우다가 인문계열인 미술사학을 배우게 된 나에게 미술사학과에서의 나날은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번엔 내가 전혀 다른 공부를 하게 되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그것들을 극복해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미술사학과에 입학한 뒤로 놀랐던 광경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방대한 PPT자료와 촬영이었다.

내가 행정학을 공부하다가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가장 크게 겪은 변화는 공부매체였는데, 종이책을 넘겨가며 하던 공부가 매 수업마다 제공되는 PPT 자료를 보고 그림(이미지)을 외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각종 사회학 이론과 학자의 이름을 외우던 것이 수많은 화가들, 작품의 이름을 외우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따금씩 PPT자료를 제공해주지 않는 강의를 듣게 되면 스크린의 화면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찍곤 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매번 앞자리 사람들의 머리가 나오지 않게 두 팔을 높이 들고 사진을 찍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 번째는 개인주의적인 학업분위기였다.

행정학과에 있을 때는 일명 '팀플'이라고 불리는 조별과제와 발표가 굉장히 많았는데, 미술사학과에 다녔던 4학기 동안 조별과제를 경험해 본 것은 딱 한 번 뿐이었다. 때문인지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는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친해진 사람들이 전부 편입생이었던 까닭도 있었다.


수업을 듣는 첫날, 강의가 시작되기 무섭게 서라운드 사운드처럼 들려오는 키보드치는 소리를 듣고 놀랐을 만큼 다들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해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는 인상도 있었다.




 편입 후 첫 학기였던 3학년 1학기.

그때만해도 배우지 않았던 학문이니 스스로에게 약간의 유예를 주자고 생각하면서도 첫 성적표를 받았을 때는 실망이 컸다. 이전 학교에서는 수석까진 아니지만 장학금을 받을 정도의 성적이었는데 첫 학기 시험 성적표는 A+은 커녕 B+이 태반에 C+도 있었다. 한 학기동안 놀지도 않고 전공공부에만 매달렸던 나로서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점수였다.


그리고 맞이한 3학년 2학기.

첫 학기에서의 실수를 줄여보고자 놓쳤던 자료도 꼼꼼히 챙겨놓고 첫 학기에는 하지 않았던 강의녹음까지 감행했다. 어떤 강의는 애초에 교수님께서 녹음을 금지하기도 했고, 녹음을 했더라도 대부분은 공부할 때 거의 듣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첫 학기보다는 요령이 늘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1학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성적에 나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마 첫 학기 때의 실수를 충분히 만회할 만한 노력을 할 수 있는 한 전부 기울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민 끝에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학업에 대한 전반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학과장 교수님의 연구실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당시 '성적'에 굉장히 민감해져 있었던 나로서는 내가 향하는 곳이 교수님의 연구실이라는 것도, 교수님 중에서도 학과장 교수님의 연구실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그 이유를 추정해보건대 학과장 교수님이 공교롭게도 내가 편입시험을 볼 때 무시무시한(?) 전공질문들을 날렸던 그 면접관이었기 때문에 더 도움이 되는 조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온화한 인상에 나쁜 말은 듣지 않겠거니 했던 것이 두 번째 이유였던 것 같다.


수업을 끝낸 어느 날 연구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조교가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약간의 피로가 묻어나는 얼굴로 조교가 무슨 일인지 물었고, 나는 그때에서야 내가 사전에 시간조율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이곳에 왔다는 자각이 들었다. 아차 싶은 찰나에 "들어와요." 하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쭈뼛거리며 들어선 연구실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평소 온화한 성품으로 자자한 교수님은 약속도 없이 찾아온 내가 "학업과 관련해서 상담을 하고 싶다"고 말하자 살짝 당황하신 듯 보였다. 그 순간 교수님과 조교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조금 뒤에 일정이 있어서 상담을 하기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교수님의 말에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아, 네..알겠습니다."하고 답했다. 돌아서서 나오려는 순간 교수님이 조교를 불러 다음 일정을 묻더니 나를 다시 자리에 앉히셨다.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생각했던 것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전공을 괜히 바꿨나 하는 회의감이 들어요.."


..라는 취지로 고민을 얘기하자 내내 말없이 듣고 계시던 교수님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보기에..그렇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단호한 목소리였다. 막연한 위로라도 바랐던 나의 기대가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교수님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제까지 들었던 전공과목은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교수님의 생각으로 내 성적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알고 있는 것에 비해 너무 어려운 수업을 먼저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말인 즉슨, 전공과목의 커리큘럼은 대개 학년별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것은 전공기초과목을 이수했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커리큘럼이고, 나와 같은 편입생은 알고 있는 것이 신입생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고학년의 수강과목이 어려웠으리라는 해석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다음 학기에는 개론이나 기초과목 위주로 들으면서 미술사학의 토대를 세워나간다는 생각으로 수강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이 날 상담의 끝에 "너무 조급해하지도 말고,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며 격려해주셨던 것에 위로를 받아, 그 다음 학기부터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교수님들을 따라다니며 물었고, 이메일로 소통하는 등 좀 더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그 결과 성적은 점점 올랐고, 4학년 마지막 학기 기말고사에서는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날의 일이 기점이 되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교수님으로부터 "대학원에 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은 4학년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던 11월의 어느 날, 학과장 자리에서 물러나신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진행된 진로상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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