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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돌씨 May 06. 2022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겠습니다

: 2년 간의 타지 생활을 접고, 다시 서울로.

 나는 태어나 자란 서울을 떠나 고속버스로 3시간가량 가야 하는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도시의 소음에 익숙한 내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산이 둘러싸고 있는 대학 캠퍼스가 있었다. 대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자취방에 짐을 풀었던 2월의 마지막 날, 그날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눈이 허리춤까지 쌓이고, 어둠이 빠르게 내려앉은 그곳에서 난생처음으로 느꼈던 적막감은 아직까지도 한 컷의 영상처럼 생생하게 남아있다.


저무는 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바닷가의 풍경, 낯선 사람들, 홀로 잠드는 밤,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문득 무서워졌다.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우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 건 취미로 하는 게 좋을거다"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내 전공은 행정학과였지만 사실 나는 사학과에 가고 싶었다. 싫증도 잘 내고 싫은 건 곧 죽어도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질리지 않고 공부했던 과목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사건은 중학교 때 "사학과에 가겠다"는 내 말을 듣고, 친하게 지냈던 한 선생님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건 소일거리로, 취미로 하는 게 좋아"라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사학과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행정학과를 지망으로 대학교 원서를 쓸 때만 해도 행정학과에 가면 공무원 시험을 볼 것이고, 그중에는 문화재청 자리도 있겠지 했었다.

(물론 이건 그 안에서도 행정직과 연구직이 나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시절의 착각이었다..)


사진제공: 소소

입학 이후로 대학교에서의 2년은 정말 후회 없이 보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겨보자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첫날 밤 울며 잠들었던 것이 민망해질 정도로 신나게 놀았고, 빠르게 적응했다. 못 해 본 것들 중에 당시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을 다해서 해 봤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 갈 때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더 이상 얻어갈 수 있는 게 있나?"


학업은 더할 나위 없이 순항 중이었지만 재미가 없었고, 하고 싶었던 동아리 활동이나 유흥문화도 원하는 만큼 즐겼던 터였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원인 모를 갈증이 계속됐고, 문득 환경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휴학 원서를 내고 서울에 남았을 때, 언니는 백수 놀음 중이었던 내게 "이렇게 된 거 편입 시험 준비나 해보라"는 말을 했고, 나는 '까짓 거 해보지' 하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뒤로 1년 동안 편입학원을 들락거리면서 영어공부를 했다. 그리고 대망의 원서접수 날, "딱 세 군데만 넣어보고 셋 다 안 되면 깔끔하게 접자" 하고 세 곳의 대학교에만 원서를 냈다. 오래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인류학과, 미술사학과, 사학과 이렇게 세 군데 학과에 원서를 냈던 것 같다.


당시 인문계열 학과의 편입학 시험은 대부분 1차는 영어필기시험, 2차는 면접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 따라서는 2차 전형을 안 보기도 했고, 논술시험을 보는 곳도 있었다.)

세 곳의 필기시험을 모두 응시한 결과, 인류학과와 사학과 필기시험을 떨어지고 미술사학과 필기시험만 통과해서 2차 면접시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일단 그림도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하니까 해보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시 미술사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명확하게 어떤 학과 인지도 몰랐고, 이름 그대로 미술의 역사를 배우는 건가 보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림도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하니 잘 맞을 것 같다는, 그런 단순한 결론을 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성적으로 모의 지원했을 때 안정권에 있었던 학과 중에 하나였던 이유도 있었다.


미술사라는 학문을 배워본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행정학과를 다닐 때 한 학기 교양과목으로 배웠던 한국미술사 정도 일까. 미술사학과에 지원한 것은 얄팍한 경험에서 나온 '재밌었지'라는 감상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뭔지는 잘 몰랐지만 면접까지 보게 됐으니 해보자, 했던 것 같다. 언니는 면접 예상 질문을 만들고 있던 내게 전공책 2권을 구해다 주었고, 그때만 해도 그 책들이 불러올 결과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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