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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Jul 31. 2019

매미의 기억

   많은 경우 기억이라는 것은 남을 것은 남고 흩어질 것들은 흩어져 각자 안에 지층처럼 조금씩 켜켜이 쌓이다 그 사람 고유의 역사와 변화를 돌아볼 때 다시 요청되곤 합니다. 내 안의 과연 어떤 신체기관이 각 사건들의 중요성을 평가하여 '음, 그래 너는 오래 남을만하겠어' 판단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고 또 가끔은 그 판정 마치 오심을 대하는 운동선수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왜 이걸 기억하는 거지'처럼. 하지만 내가 매사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 처리를 해준다는 점, 그리고 그 작업의 속도가 빠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알 수 없는 '기억저장자'의 수고에 감사를 어느 정도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아야 하는 것들만 남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존재의 구심점이 될 수 없기에, 더 이상 기억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따금씩 분명 첫 번째 분류 작업에서 뒤로 밀려났던 기억인데 특정 상황들에 - 특히 무언가가 부재하는 상황 - 다시 끄집어져 완전히 다른 무게와 선명함으로 돌아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미 재구성된 기억의 창고에서 수고스럽게 다시 꺼내와야 했을 만큼 나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중요했던 기억들인가 봅니다. 매미의 울음이 내 경우엔 그랬습니다.


   매미와 관련된 어떤 특별한 경험들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시골집에 잠시 맡겨져 있을 동안 자주 들었다는 기억, 예전에 살던 집 마당에서도 여름엔 그 울음이 들려왔다는 기억 정도입니다. 매미에 물렸다거나(물릴 수가 있나요?), 떼로 나에게 달려들었다거나, 무거운 허물을 벗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거나 하는 강렬한 체험은 전무했습니다.


   매미가 나의 기억 한 켠에 예전보다는 더 큰 자리 잡은 것은 근래 들어서입니다. 집 안 마루에 다리를 뻗고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마당을 바라보는 동안 매미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어느 순간부터 여름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펼쳐져 계절을 표상하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정경이 충분한 만큼 재현되지 않으면 그 해 여름은 무언가 여름답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들곤 합니다.


   기억이란 것은 빈번하게 왜곡되며, 재구성되고, 이따금씩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미화되기도 하기에 나는 나의 이 여름의 기억과 거기에서 울리는 매미의 소리도 어느 정도 꿈처럼 부풀려졌나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점점 더 그 장면을 충분히 재현하는 여름이 적어진다 스스로 느낀 것 역시 나의 인지적 착각이 아닐지 자문해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토록(까진 아니더라도) 기다리던 매미 소리가 기대만큼 정겨운 정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매미에 대해 아주 간략히 나마 공부를 해보니 그 의문이 조금 해결되었습니다. 아마 기억 속에서 울던 매미들은 참매미류였던 것 같은데 내가 최근에 듣는 것들은 말매미류인 듯합니다. 똑같이 필사적으로 우는 매미들이지만 이미 나에겐 참매미의 울음소리가 매미 소리의 기준음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장혁 씨의 노래 중 <매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 그것의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길고 긴 날을 견뎌 고된 침묵을 뚫고 은밀한 날개는 조금씩 자랐어

      허물 속에서 끝날 순 없어 아직 내가 아니라고 수천 번 되뇌이며 또 꿈을 꿨지

           ... ...

      허락된 시간은 얼마 없지 불평할 시간도 없어 가진 걸 다해 이 노랠 토해내야 해

      너희는 싫어할 수도 있어 닥치라고 욕해도 이것이 내가 여기 있는 이유지

      이제 곧 여기에서 떨어져 흙이 되어버려도 결코 나는 후회 없이 천둥처럼 노래해야 해"


   약 한 달을 노래하기 위해 몇 년 동안을 땅 속에서 꿈꾸며 기다려온 매미가 음악가의 마음을 울렸던 것 같습니다. 매미는 그 특유의 울음소리를 위해 자기 몸의 반절을 텅 비워놓도록 진화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종류는 약 17년 동안을 유충으로 땅 속에서 보낸다 하니 정말 오로지 노래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생애 자체를 바치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끝끝내 노래를 시작한 매미의 울음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도시 속에서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건 대개 유독이나 크게 우는 말매미류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 번쯤 그들에게 노래에의 매미의 그 간절함 같은 걸 알려주고 싶기도 합니다.


   나 역시 작은 노래들을 몇 개 낸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기회들이 있어 아직 제대로 완성해주지 못한 곡들을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허나 이제 계속 그 모습이 커져만 가는 현실의 문제들이 나를 압박하기도, 또 정말 조용히 외딴곳에서 울리는 것만 같은 이 노래들을 누구라도 찾아줄까 하는 암담함이 나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내며까지, 도대체 무얼 위해 노래를 전해야 하나 질문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다시 여름이라 그런지 불현듯 매미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오직 노래하기 위해 기다리고 소원하며 준비해온 그것의 짧은 삶이 떠올랐습니다. 이장혁 씨도 노래했던 그 기억에, 의 소리와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것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이유를 찾아야 하나 스스로 타일러보았습니다. 불평할 수도 없을 만큼 짧게 남은 나의 시간에, 후회 없이 노래를 남길 수 있도록. 오로지 그것을 위해 자신을 텅 비워냈던 것처럼 말입니다.


[ 이미지 출처 : Sara Bright, <Cicada S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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