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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공간 Aug 05. 2019

길을 떠나면 길이 된다

제주도에 내 식당 창업하기 Ep. 5







조선소는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다. 사다리를 타고 50m 이상 올라가야 하기도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기에 버티고 이겨내야 했다. 그야말로 버티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추천받았다. 호주는 기본적으로 최저시급이 높을 뿐 아니라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요리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동료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때였다. 민석 형이 자신도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은.


민석 형은 조선소에 근무하는 우리 팀 중에서 유일하게 내 또래였던 동료였고, 같은 숙소를 쓰면서 빠르게 친해졌다. 심지어 민석 형도 식당 창업을 꿈꾸고 있었다. 호주에 가기 전에 함께 전국 여행을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함께 추억을 만들 수도 있고 생각도 정리될 것이라고 했다. 함께 식당을 차려도 좋겠지만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박수치면서 응원해주자고 했다. 나 역시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긴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그때는 이 선택이 나의 삶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며 방향을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배낭을 메고 길을 걷고 텐트에서 자는 여행을 계획했다. 동해를 따라 부산부터 강원도 양양까지 걸었고 버스를 통해 서울로 이동했다. 민석 형과의 시간은 즐거웠지만 여행지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온 김에 전국 여행을 그만하고 좋은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면서 시장조사를 해볼까? 하는 이야기도 나눴다. 그래도 계획한 건 끝까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목적지인 제주도로 향했다. 하아…. 제주도와 사랑에 빠질 줄이야. 눈앞에 펼쳐진 바다, 등지고 있는 한라산, 굵직굵직한 검은 돌덩이들이 나를 반겼다.


동문시장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먹던 중 벽면에 붙어 있는 게스트하우스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빛이 오갔다. 조천읍 바닷가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기로 했다. 거실 창문에서는 바다가 보였고, 저녁 시간이면 게스트들과 모여 바비큐 파티를 했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쉬러 왔다고 했다. 뭐에 그렇게 쫓기듯 살았을까? 나부터도 말이다.


올레길을 걸었다. 뜨거운 용암을 간직한 화산섬이 이토록 평온할 수 있을까. 창업을 위해 달려오던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조금은 지쳐있었나 보다. 검은 돌들 사이에서 비치는 제주도의 바다는 그 자체가 힐링이었다. 호주로 향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제주도에서의 일정이 조금씩 길어졌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매일 행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아놓은 돈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너 지금 제주도라며?” 여행을 마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던 중에 군대 동기인 제주도 토박이 동환이가 연락을 했다. 밥을 사줘야겠단다. 토박이의 안내를 받아 제주 투어를 시작했다. 무얼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군 시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친구라 그런지 무척이나 위로가 됐던 하루였던 그 감정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그래서 떠나기 전에 제주도의 지인들에게도 연락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을 테다. 비록 이번에는 못 만나지만 다음에 보자고. 제주도에 와 있었으면서 일찍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언제 내 인생이 뜻대로 되던가. 여수 엑스포에서 만난 제주도 토박이 나솔 누나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던 참이었다.


“제주도에 더 있을 생각은 없어? 마침 지인 회사에서 사람을 한 명 고용하려던 참이야!”


두근.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또다시 결정의 순간이 왔다고. 민석 형과 나는 정말 자금이 다 떨어진 상태였고 당장이라도 일을 해야 했다. 제주를 떠나든 제주에 남든 선택해야 했다. 상황을 선택하는 일이 사람을 선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험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면접을 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해줄 수 있느냐 물었다. 요리를 하고 싶고 나의 식당을 갖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들은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사무실에 데려갔다. 책이 정말 많은 곳이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게 목적이면 사채업자를 소개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돈만이 목적이 아니라면 식당을 차리기 전까지 나와 함께 일을 해보는 게 어때?” 내 인생의 멘토, 김외솔 사장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밤이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파티가 끝나고 몇몇 사람들은 바닷가로 향했다.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래로 바다가 펼쳐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이빙을 시작했다.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포기했는데, 내 뒤로 민석 형이 있었다. 주저하던 형은 멋지게 뛰어내렸다. 그날 밤 나와 형은 방파제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말없이 한참을 있었다.


민석 형에게 “미안하지만 난 새로운 길을 가겠어”라고 말을 했다. 민석 형은 그날 밤 흥건히 취해 돌아왔다. 인생은 이토록이나 아이러니하다. 내 식당은 누군가를 편안하게 해주는 공간이 되고 싶다고 늘 말했지만, 민석 형과의 작별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나의 제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음식은 삶의 일부분이다. 맛있는 음식은 누군가의 슬픔을 달래주고, 기쁨을 더해준다. ‘식사하자’라는 말이 인사가 되는 건 음식이 인간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문득 형이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가끔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소주 한잔 생각나는 밤이에요.’ 그리고 다시금 다짐한다.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식당을 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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