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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Aug 03. 2023

여행의 속성이란.

처음에서 단단한 다음을 끌어내는 것.

“한 달만 기다려주시면 다녀와서 보충수업까지 성실히 메꿀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무작정 과외를 미뤘다. 학기 말까지 시험공부를 병행하며 일주일 2번, 4건의 과외를 소화했다. 그야말로 숨 가쁘게 달렸다. 통장 계좌에 뿌듯하게 남은 삼백만 원 중 계약금 10만 원을 봉투에 담아 학교 담벼락에서 보았던 한 달 유럽 배낭여행을 광고했던 여행사로 향했다.


삶에는 때로 저지르고 보는 일도 있어야 한다. 여권을 만들면서 나의 여정은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가족에게는 통보만 하면 그만이지. 때마침 2002 월드컵이 끝난 직후라 서울엔 한창 붉은 티셔츠 물결이 뜨겁게 요동쳤다. 서울의 뜨거운 분위기가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바게트를 씹으며 다른 한 손엔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여행자의 행색으로 이국적인 풍경을 헤매고 싶었다.


“같이 나갈 친구가 있으면 허락할게. 절대 혼자서는 안돼.”

엄마의 의지는 완강했으나 의외로 ‘친구가 있으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으니 해 볼 만했다. 지금 당장, 한꺼번에, 목돈을 지출할만한 부유한 친구들을 떠올렸다. 조금은 어수룩한, 해외 배낭여행에 대한 선망도 있고, 무엇보다 나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친구가 필요했다. 마침 적당한 친구가 있었고, 더불어 그 아이의 부모도 나를 좋아하셨으니, ‘딸의 값진 경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어주실 것 같았다. 준비부터 잠자리를 봐주는 일, 먹을 것을 챙겨주는 일까지 손이 많이 가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녀는 장 보거나 기념품을 살 때 나와 다르게 돈 계산을 기막히게 잘했다. 걸어 다니는 환율 계산기랄까?


반바지와 긴바지 각 한 벌에 민소매, 반소매, 긴소매 티셔츠 각각 하나, 바람막이 점퍼에 양말 두 개, 위아래 속옷 두 벌, 슬리퍼 하나, 스니커 하나를 배낭에 꼬깃꼬깃 넣고, 생활 도구와 지도책, 가이드북도 챙겼다. 기차에서 밤을 새 가며 국경을 넘을 날이 많을테니 머리를 감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 동네 미용실에서 3만 원을 주고 웨이브 파마도 말았다. 당시의 행색은 그야말로 히피 그 자체, 아니 어쩌면 노숙인에 가까웠을지도. 엄마는 그로부터 십수 년 뒤 당시 간소했던 내 짐을 보며 저 아이가 과연 무사히 한 달 반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의아했다고,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국제전화를 기다렸노라 고백했다. 어쨌거나 나는 환율 계산기 그녀와 거지꼴로 무사히 유럽 7개 국가의 국경을 넘나들었다.


기대에 벅차 떠났다. 과연 나는 무엇을 얻었던가. 부모님으로부터 멀어져 타국에서 누리는 자유, 생소한 문화 속에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나를 확인하는 과정은 배낭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수확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일상의 평화는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있다는 깨달음도 함께 했다. 물 흐르듯 발걸음 닿는 대로 가다가도,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당황하고 조급해졌다. 함께 떠났던 이와 예민하게 날을 세우며 보냈던 밤도 허다했다. 내 결정만 바라보는 일행을 볼 때마다 홀가분하고 싶어서 멀리까지 왔는데 왜 이들을 책임져야 하나 원망도 했다. 홀가분함과 안도, 허탈감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딱 한 달 내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익숙한 집의 공기는 떠남을 준비했던 당시의 설렘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여행이 결국 돌아오려 떠나는 것 아니겠어?’

스스로 위로했다. 여행은 늘 그랬으니까.

 

느릿느릿 짐 정리를 했다. 시차에 꾸벅꾸벅 졸다가, 배가 고프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냉장고를 뒤져 김치에 밥을 마구 퍼먹었다. 익숙한 일상의 속도에 합류하며 찬찬히 여행을 복기했다. 오래된 숙소였지만, 별은 잘 보였어. 머리를 못 감아서 꿉꿉했지만, 기차에서 맞는 밤공기는 시원했지. 무엇보다 풍경이 기가 막혔어. 여행지에서 즐기는 커피는 별거 없어도 유난히 향기롭지. 금세 여행은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탈바꿈했다.


지금의 나는 배낭여행을 하던 당시에서 20년이 더 지나 삶의 속성을 깜냥껏 논하는 나이가 되었다. 앞으로도 여행은 내가 바라는 무언가를 안겨주진 않을 테다. 하지만 여행을 핑계 삼아 무심히 지나쳤던 마음을 깨닫는 건 그날의 여행과 오늘의 여행이 갖는 공통점이다. 그러니 난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집을 나서는 선택을 하겠다. 타인의 결정에 나를 내맡기다 보면 스스로 경험해 깨닫는 순간의 감격을 포기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비록 여행이 돌아오는 것으로 완성될지라도, 여행의 과정이 곧 현실과의 타협이더라도, 여행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분명히 알게 한다. 오직 나의 선택만이 허락되는 상황 속 ‘처음’을 경험한 나의 ‘다음’은 더 단단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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