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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Aug 30. 2023

안녕히

온 마음 다해

화요일 오전은 글방 수업이 있어 책방에 간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건널목을 건넌다. 동사무소 방향 골목에 접어들면 쭉 뻗은 골목길 어귀에 배롱나무 한그루가 머리에 분홍 꽃무리를 이고 섰다. 초여름에 아롱다롱 봉오리가 달렸는데, 한여름 찌는 더위에 만개했다. 배롱나무는 백일동안 꽃이 피어서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처음 꽃봉오리를 눈여겨본 게 7월, 그러니까 이 녀석은 찬바람 부는 10월까지 한 자리에서 버스에 내린 나를 가장 먼저 맞아주고, 집에 돌아갈 나를 제일 나중에 배웅할 예정인 게다.


모나지 않았으나 낯을 가리는 탓에 요즘처럼 많은 이를 만나고, 일상을 공유하고, 안부를 건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통제가능한 공간, 익숙한 사람, 이미 아는 맛을 좇았다. 눈앞에 놓인 것, 만져지는 것에만 시선을 두었다. 멀리 떨어져 미처 도달하지 않은 우연에 대해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서글픔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이 삶 어찌해 볼 수 없고, 큰 기대보다 매일 조금 더 나아지는 것만 바랐으므로.


어린 시절의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허우적댔다. 그때는 건강한 내일과 대책 없는 사랑에 아파하던 뜨거운 마음과 같은 손 안의 기적을 꼭 쥐고 있었다. 무엇이 있는지 미처 알기도 전에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 술술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의 두 배만큼 나이를 먹었다. 달구어진 금속이 서서히 식어가듯, 달뜸의 기억도 수명을 다해갔다.


요즘의 나는 어김없이 해가 뜨고 제시간에 나를 깨워줄 알람이 있다는 삶의 규칙성에 위로를 받곤 한다. 파도가 밀려오면 곧바로 물러선다는 당위, 누구나 그 시절을 떠나보낸다는 보편성, 그리고 사랑하고 나면 반드시 물러날 때가 온다는 법칙과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혜화동 골목의 배롱나무도 늘 제자리라는 항상성으로 다가왔다. 가방 무겁게 뭔가를 나르고, 말하고, 떠든 날에는 잘하고 있는지 재차 확인하고픈 강박과 뒤처지면 어쩌지라는 불안, 여전히 주책맞게 날뛰는 성질머리에 오가는 길이 종종 서글퍼진다. 여름내내 배롱나무는 무던히 그 자리에 있었고. 퍽 위안이 되었다.


내 마음의 소용돌이를 짐작했던 것 마냥 뜬금없이 문자를 보낸 친구와 ‘시절인연’이라는 말로 선문답, 아니 선안부를 나누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 마흔 인생 가장 든든한 지원군과 결코 마지막이어서는 안 될 점심을 먹었다. 나이를 먹는 일은 쌓인 우연을 제거하는 일이라던데, 어찌 된 일인지 늘 곁에 있을 듯했던 오랜  우연의 소산부터 지워져 간다. 우연이 제거된 자리에 남는 것은 같이 얼굴 맞대고 먹은 밥, 서로의 눈가에 자글해진 주름, 칠칠맞다며 챙겨주는 냅킨 같은 기억이다. 모두 한때라는 말마따나 돌아서면 금세 다른 일상에 쫓기듯 살겠지만 오며 가며 빈자리를 느끼며 허한 마음 둘 데 없겠지. 서운한 마음 꾹 누르며 내 삶의 굴곡과 무관하게 곁을 지켜준 이들에게 충실하겠다고 다짐한다. 막다른 곳이라 느껴질 때 나를 붙잡아주는 건, 온 마음으로 나눈 그간의 기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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