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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영 May 24. 2023

덕유산의 두 번째 부름

산이 나를 부른다

산악회 모임의 이름은 산나부. 산이 나를 부른다. 회원은 다섯 명, 회장은 나다. 산나부는 산악회인데 정상까지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비운의 클럽이다. 산에는 안 올라도 한 달에 한 번 꼭 등산복 차림으로 만나는 이상한 사람들로 채워진 산악회, 산나부.


우리는 여러 번 산의 부름을 받지만 대부분 외면했다. 이럴 때는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다. 지난 4월, 덕유산의 첫 번째 부름이 있었지만 우리는 응답하지 않았다. 등산을 핑계로 캠핑을 했고 여러 이유로(덕유산이 나를 부르다 말았다 참고) 부름을 받들 수 없었다. 그래도 한 달의 한 번 등산을 하겠다는 약속은 제대로 지키고 있어서 일찍이 덕유산의 2차 부름의 응답할 날을 잡아 두었다.


회원 한 명은 서울에서 일을 하게 되어 남은 넷이 월요일 오전 9시까지 덕유산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원래 지각 같은 걸 하는 인간이 아닌데, 등산 가는 날엔 이상하게 조금씩 늦는다. 몸이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멀쩡했고 다른 핑곗거리를 찾지 못해서 부랴부랴 차를 끌고 덕유산으로 향했다. 


20분 늦었을 뿐인데 꼴찌였다. 얼굴에 가기 싫어 죽겠다가 쓰여 있는 나와 달리 다른 회원들은 꽤나 발랄해 보였다. 회원 한 명이 가방과 옷이 예쁘다며 칭찬했다.


- 가방 컬러가 예쁘다. 새로 샀니?

- 아니, 그때 한라산 갈 때 산 거야.

- 일 년 안 됐으면 새 거야.

- 응..


산나부 회원들을 만나다 보면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게 된다.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들이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여 대답은 잘하는 편이다.


편의점에서 라면과 물을 사는데 집에 지갑을 두고 왔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거기서 알게 됐다는 건 뻥이고 반쯤 왔을 때 알아차렸다. 나는 라면 두 개와 뜨거운 물을 내 가방에 넣는 조건으로 자연스럽게 결제를 양보했다. 회원들은 가방에 든 게 많다고 했다. 들어있는 걸 다 모으면 내 삼일 치 식사가 될 것 같았다. 어딜 간다고 생각하고 이 많은 것들을 싸 온 건지 이해 할 순 없었으나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분명 내 몫도 있을 테니까.


다들 만반의 준비를 했는지 모여 있으니 꽤나 그럴듯한 산악인처럼 보였다. 몸을 푸는 회원들을 보니 뿌듯했다. 이 맛에 산악회 하는구나! 산악인이라고 하니 엄홍길 대장님이 생각나고 꽤나 대단한 걸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산악인이라는 말 말고 등산인이라는 말을 써야겠다. 이 등산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등산인도 아니고 산책인 정도로 불려야 할 것이다.


오늘을 위해 산악회 이름과 자신의 목표가 담긴 단체 네임택도 준비했다. 네임택에 새겨 넣은 의지대로 산에 오른다면 정상을 두 번 세 번도 찍을 수 있을 텐데 산 앞에서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기란 꽤 어렵다. 마음은 정상, 몸은 하산을 원하니까.


시작은 괜찮았다. 회원 한 명이 시작하자마자 내려가고 싶단 소릴 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어머, 다람쥐야! 어머, 저 새는 뭐야. 우와, 저건 고사리야! 처음 20분 간은 이런 수다를 떨 정도로 멀쩡했다. 하지만 등산이 늘 그렇듯 한 시간을 오른 거 같은데 시계를 보면 10분 밖에 안 지나있다. 표지판에는 완만한 길이라도 쓰여있는데 느낌상 절벽을 기어오르는 듯하다. 우리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선두가 생기면 뒤처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 간격은 벌어지고 선두는 멈출 생각이 없으며 뒤쳐지는 회원들도 따라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간격 그대로 백련사까지 오르게 됐다.


점심은 향적봉 정상에서 먹기로 했으나 배가 고파서 중간지점인 백련사 계단 아래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깠다. 라면과 유부초밥, 김밥, 방울토마토, 샌드위치, 초콜릿.. 한라산 갈 때로 이렇게 바리바리 싸진 않았던 거 같은데.. 신발도 벗었겠다, 엉덩이도 땅에 붙어 있겠다, 배도 부르겠다,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정상? 우습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누구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낄낄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일이 터져버렸다. 깔깔낄낄 하는 사이에.


회원 한 명이 백련사 앞 현수막에 ‘통제’ 어쩌고가 쓰여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향적봉 통제. 곤돌라 정비 기간. 5월 15일부터 19일까지.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가 덕유산에 오른 날이 바로 15일이다. 스승의 날이자 덕유산 곤돌라 정비를 시작하는 날!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회원들은 덕유산 국립공원을 비롯해 이곳저곳에 전화를 했고 월요일엔 대부분이 정기휴무이기 때문에 연락이 되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한 곳에서 전화를 받아 통제 상황을 알려주었고 우리는 경악했다.


한편, 나는 편안해졌다. 됐다, 됐어. 덕유산이 날 이렇게 도와주는구나. 회장 된 입장으로 회원들 앞에서 티 낼 수는 없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회원들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그러다 노부부가 우리를 지나치게 됐고, 그들에게 물은 결과 향적봉은 통제가 되었으며 당연히 곤돌라도 탈 수 없다는 답변을 듣게 됐다. 이럴 거면 덕유산은 우리를 왜 부른 걸까. 사실 덕유산은 부른 적 없는데 우리가 부르고 우리가 대답했다는 게 맞는 걸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내려갑시다! 나는 포기가 빨랐고 회원들은 회장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계단이 많아 백련사에 들어갈 생각도 안 했던 우리는 ‘사진이나 찍자’는 누군가의 말에 자연스럽게 그곳을 오르기 시작했고, 앨범에 사진 몇 장은 남길 수 있게 됐다. 우리는 긍정적인 산악인, 아니 등산인, 아니 산책인들이다. 산은 여기에 계속 있으니 또 오면 돼! 내 말에 회원들이 맞아, 맞아! 대답했다.


우리는 긍정적인 반면 앓는 소리를 잘한다. 처음엔 정상에 오르기로 약속했으면서, 백련사에서 입구까지 내려갈 힘은 없었다. 향적봉이 통제가 안 됐어도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 여튼,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다 나와 회원 한 명이 백련사 입구에 서 있는 버스를 발견했다. 버, 버스야, 버스으으! 두 명의 회원이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오늘 본 얼굴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그 버스는 노약자, 위급 상황에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덕유산국립공원 버스였는데 평일이고, 사람이 없고, 어떻게 보면 우리 넷 모두가 위급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주차장까지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립니다! 기사님이 소리쳤다. 차로 20분 걸리는 거리를 올라간 거냐며 우리는 서로를 칭찬했다. 버스 안에서 덕유산국립공원 직원을 만나 사파리 탐험하듯 덕유산 스토리를 들으며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 금방이었다. 거의 도착할 때쯤 옆에 앉은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 저분은 덕유산국립공원에서 일하는데 쉬는 날에도 덕유산에 온 거야?

- 그런가 봐..

- 와..


그런 말을 하며 우리는 덕유산국립공원 10분 거리에 있는 커다란 카페에서 달달한 커피와 초콜릿케이크를 나눠먹었다. 회원 한 명이 결혼 턱으로 계산까지 해주어 나머지 셋은 더 행복해졌다. 시원하고, 폭신한 소파에 앉아 있으니 초콜릿 케이크를 먹지 않아도 몸과 맘이 달달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산악인에서 산책인이 되어 덕유산의 두 번째 부름에 답하지 못했지만, 계룡산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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