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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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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연 Jul 16. 2019

김이나의 밤 편지가 건네는 여백 있는 '위로'




12시가 되면 내게 날아드는 편지가 한 통 있다. 그 편지를 한참 매만지노라면 달큰한 음악과 함께 김이나 작사가의 오프닝 멘트가 들려오고, 편지를 펼쳐보면 비로소 깊은 밤이 쏟아져 내린다. 새벽 감성에 취한 탓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늦은 밤, 정기적으로 받는 편지는 처음이어서 그런 걸까. 한 시간 동안 그녀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괜히 가슴 한 켠이 두근거린다. 아니, 두근거리다 못해 다가올 새벽을 기다리게 된다. 김이나의 밤 편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게 딱 그러한 존재였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떠나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순간. 


‘너무 행복한 한 시간이었어요.’, ‘밤디(밤편지 DJ) 덕분에 가사의 힘을 알게 됐어요.’ MBC mini를 통해 쏟아지는 청취자들의 사연들을 보노라면 모든 청취자들이 공유하는 감정은 꽤나 비슷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밤 편지가 내게, 그리고 또 다른 청취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과연 뭘까. 많은 코너와 지나간 말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다 특히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던 코너 두 개를 중심으로, 그 속에 숨겨진 감성들을 파헤쳐보았다.




ㅣ 정신없었던 금요일의 마무리는 전. 작. 시로 ‘헤아려보기’


작사가가 받아들이는 가사들은 어떨까? 아주 간단하면서 또 모두가 궁금해할 법한 질문에서 시작된 코너, 전지적 작가 시점. 세상의 모든 노랫말을 나노로 분석해준다는 김이나 DJ의 말과 함께 시작되는 코너는 큰 하나의 주제를 잡고, 이에 해당되는 두 가지의 노래를 골라내 분석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굵직한 키워드가 있다면, 거기에 해당되는 노래들을 골라내 가사를 읽으며 작사가의 시점에서 해석하고, 또 분석한다는 것이다. 청취자들은 자연스레 밤디의 설명에 따라 가사들을 여러 번 곱씹고, 또 삼켜낸다. 


숨이 자꾸 멎는다 네가 날 향해 걸어온다
나를 보며 웃는다 너도 내게 끌리는지

인기 아이돌 EXO의 ‘으르렁’이라는 노래를 두고 밤디는 말랑말랑한 로맨틱함을 느낀다고 한다. ‘으르렁’은 수비형 로맨스라는 말로 대변되는, 포효가 아닌 심리로서의 으르렁거림을 아주 잘 표현한 곡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으르렁’의 분석은 이내 외국에서 받아오는 데모곡과, 여기에 달라붙는 한국어 가사의 상관관계 설명으로까지 확장된다. 예컨대 보통 아이돌들이 받아오는 후크송과 댄스곡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받는 것들인데, 원곡의 핵심 후렴구에선 의미 없는 영어 단어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 밤디의 추측으론 ‘으르렁’이라는 후렴구가 ‘get it on’으로 반복되었을 거라고.. ) 작사가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데모곡의 영어 후렴구를 한국어로 변환시키는 것, 그럼에도 노래 전체를 관통하는 ‘으르렁’으로 후렴구를 지정한 것은 굉장히 센스 있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전문 작사가이기에 가능했던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다. 



춤추는 내 모습을 볼 때는 넋을 놓고 보고서는
 끝나니 손가락질하는 그 위선이 난 너무나 웃겨

Miss A의 데뷔곡, ‘Bad girl Good girl’의 분석에선 곡의 프로듀서인 박진영의 작사 스타일에 접목한 접근이 등장한다. 노래를 포괄하는 핵심 후렴구인 ‘bad girl, good girl’은 ‘bad’와 ‘good’이라는 단어의 늘어지는 발음 특성을 활용한 명 라인이라는 구조적 이야기부터 시작해, ‘여우와 신 포도’의 주제를 관통하는 내용들까지 지적한다. 여우와 신 포도, 우러러보고 갈망하지만 내가 쟁취할 수 없는 것이니 비난하는 그 여우의 위선을 이 노래와 연결시키다니! 명쾌하고 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해석 방향에 나를 비롯한 청취자들은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김이나 DJ는 일반인들이라면 생각해보지 못했을 법한 내용들을 오롯하게 작사가의 시점에서 분석하고, 또 풀어낸다. 작사가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풀어내며 또 그 속에 담긴 정서적 결을 함께 매만지는 일은 분명 또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일 테다. 물론 거창한 비평을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왁자지껄하게 청취자들과 떠들며 예능감이 수반된 진행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원래부터 존재하는 문장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청취자들을 도울 뿐이다. 곱씹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의미를 새기고 또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흘러간 마지막 평일, 꿀 같은 주말을 기다리며 휴식하고자 하는 청취자들에게 마치 주변의 음악을 한 번만 더 헤아려보자고 말하는 것만 같은, ‘전지적 작가 시점’은 그렇게 흘러간다. 




ㅣ주말이 딱 절반남은 토요일의 끝엔 책 속 문장을 ‘곱씹어보기’


토요일의 코너는 ‘북 트레블러’로, 책 속으로 떠나는 일종의 배낭여행과 같은 코너다. 이 날은 매주 두 권의 책을 소개하고 밤디가 낭독하는 시간을 가진다. 물론 평범한 낭독과 소개는 아니다. 두 권의 책을 낭독하는 사이사이, 밤디만의 사유와 단상들이 청취자들에게 공유되기 때문이다. 


밤디는 책 여행을 하며 3년 동안 5000장의 손편지를 쓰고 엮어내어 사람들에게 뜨거운 위로를 안겨주었던 박근호 작가를 두고 ‘행동하는 위로’라고 칭하고, 마음을, 삶을 건드리는 ‘문장’을 주제로 하는 책, <이 문장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을 두고는 저 또한 문장이라는 한 줄의 활자에 깊이 공감을 표한다는 말을 꺼낸다. 뿐만 아니라 음악도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것은 다름 아닌 ‘문학’인 것 같다는 너스레 아닌 너스레도 떤다. 이와 같은 그녀만의 감성과 사유들은 여행 사이사이의 지점마다 녹아들어 있다. 듣는 것만으로는 감질맛 날 정도로, 마치 서점으로 달려가야만 할 것 같은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서 청취자들은 이를 온전히 느끼고 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내가 주파수와 일체화되는 순간이다. 


특히나 이 코너가 더 특별하고 소중한 까닭은 바로 새로운 것을 발굴해낸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북 트레블러’에선 인지도 있는 베스트셀러만 다루지 않는다. 책이 하나의 주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다양한 분야, 이를테면 딱딱한 사회과학 도서부터 시작해 말랑하고 파격적인 소설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며 속에 숨겨진 보물 같은 문장과 사유들을 발굴한다. 어쩌면 이들을 소개하고, 또 다수와 공유한다는 것은 책 속의 문장에게도, 그리고 청취자들에게도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장과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일, 작사가로서, 아니, 작사가이기에, 그리고 김이나이기에 가능한 조금 더 특별한 코너인 ‘북 트레블러’는 이처럼 촘촘히 구성된다.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라디오는 여전히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켜낸다.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를 소비하고자 하는 작은 소망은 때론 라디오를 켜는 시청자들의 행위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바쁘고 복잡한 것 만을 좇는 세태 속에서 작사가이기도, 그리고 한 편지를 써내려 가는 DJ이기도 한 김이나 작사가는 그런 우리들을 토닥인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아날로그로 회귀한다. 


아날로그로 회귀하고자 하는 수요가 있는 이상, 좋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필요성은 필수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좋은 라디오 프로그램이란 무엇일까. 나는 한 유명한 작가가 했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박준-


말의 힘은 꽤 크다. 죽는 말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속으로 기어들어가 끝끝내 살아남는 말도 있다. 좋은 라디오 프로그램이란 그렇게 사람의 마음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울림을 던져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이나의 밤 편지’는 이를 아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처음 본 프로그램이 편성됐을 때, 설레기도, 동시에 나까지 긴장되기도 했다. 평소 김이나 작사가의 문장들을 충실히 사랑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작사가가 갖고 있는 내러티브가 실린 라디오에 대한 기대감, 하지만 그렇기에 지나치게 한정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까지. 하지만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묵묵히 그녀만의 내러티브를 담아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다. 빠른 것만을 좇는 요즘 세상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일 수 있을지라도 문장의 힘을 잘 알고, 그 힘을 또 믿는 밤디만의 확신은 계속해서 불나방들을 모으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청취자들에게 ‘함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며, 또 동시에 그들에게 여백 있는 소통과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프로그램이 정규편성된 지 세 달이 넘어가는 현시점에서 그 목표는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시간을 공유하는 청취자와의 여백 있는 소통, 어쩌면 좋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필수요건을 잘 함축한 문장이라는 생각도 든다. 


음성으로 변한 활자들 각각에는 응원과 위로, 그리고 소망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고, 이는 마침내 청취자들의 귓가에 내려앉고야 만다. 프로그램이 끝나버린 새벽 1시, 새벽 감성으로 대변되는 깊어진 사유들을 손에 쥐고 그녀가 보낸 밤 편지를 꺼내어 본다. 순간 더 깊은 밤이 펼쳐진다. 그 속에는 분명 따뜻한 위로가 서려 있다. 수신자는 물론 모든 청취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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