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처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마음이 고통스러워도 그 사람을 마음껏 미워하지 못했다.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천주교인이니까, 종교에서 배운 대로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언제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 길은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택하게 하소서. 화가 날 때면 위의 기도문을 떠올리며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기도를 하다 보면 그래, 내가 더 사랑받고 이해받기 위해 욕심을 부린 탓에서 갈등이 생겼구나, 내가 먼저 더 이해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누그러졌고 미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은 허울 좋게 포장한 것이다. 나는 상처 주는 대상이 두려운 사람일 경우, 그에게 굴복하는 나 자신이 굴욕적이지만 차마 대항할 수는 없으니 수치심을 덜기 위해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이렇게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보니 나는 늘 내 마음을 제대로 달래지 않은 채로 묻어버렸고 종종 그 마음이 꺼내질 때마다 그때의 수치스러움이 끄집어 나오는 것이 싫어 더욱 꾹꾹 눌렀다. '감사하기'도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이다.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때면 나는 그래도 다행인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곤 한다. 그러나 맹목적인 감사가 과연 옳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놀랍게도 대책 없이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긍정은 좋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데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라 왜곡이죠! 심지어 현재 상황이 나쁜데 좋다고 이야기하면 왜곡을 지나서 망상입니다. - 세바시 강의 / '짝퉁 긍정에 속지 마세요' /채정호 정신의학과 교수-]
짝퉁긍정에 속지 마세요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려 한다. 나는 마더 테레사도 예수님도 아닌 욕심도 많고 이기적인, 슬픔과 고통을 잘 느끼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못 따라오는데 이해하기 위해 내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 감사하기 위해 감사할 것들을 억지로 찾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여전히 나를 잘 모른다. 아마도 마음 돌보기에 소홀했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요즘은 감사일기가 아닌 감정일기를 쓰고 있다. 감정일기는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감정을 달래고 부정적인 생각의 회로를 바꾸는데 아주 효과적인 심리치료법이라 한다. 감정은 어린아이 같다고 한다. 존중받으면 얌전하다가도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 싶으면 더 심하게 칭얼대고 우는. 내 마음속에 사는 어린아이를 더 잘 달래주고 돌봐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