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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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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Dec 11. 2019

뉴스는 여성연예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언론은 한 번도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기사가 없는 게 더 낫지 않냐 


기사가 없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언론의 위상은 하락하고 있다.

지금 기사들은 어떤 말을 담고 있기에,

차라리 기사가 없는 게 낫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까. 


‘기사는 팩트다.’ 라는 말은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기사는 기자가 상황을 보고 판단한 하나의 시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흔히 이야기하는 팩트에 가깝기 위해선 기자가 제대로 된 시각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과연 그런 팩트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 가장 쉽게 사용하는 ‘다양한 시각을 함께 보여주는 기사’조차 찾기 어렵다. 


언론을 비유하는 표현 중에 ‘안내견’이라는 표현이 있다. 세상을 잘 읽고 잘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이 있을만한 이야기지만, 언론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기에 언론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기자의 해석능력은 중요하다. 그들이 사용하는 기사의 단어, 사소한 어감 하나가 세상의 시선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껏 언론은 한 번도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기사에 나오지만 

아무도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은 스러져갔다. 

언론 보도, 특히 연예 분야의 보도에서는 여성 연예인을 사람보다는 상품처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여성신문에 소개된 언론매체와 여성연예인의 관계는 이러했다. 


“언론매체는 여성 연예인의 사생활과 노출사고를 ‘알 권리’로 위장해 끊임없이 선정적으로 보도하며 트래픽을 올려 합법적인 수익을 올린다. 이렇듯 다양한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산업과 비즈니스 명목으로 젠더화된 몸과 섹슈얼리티가 상업화 되는 과정을 맥섹슈얼라이제이션(McSexualization)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여성혐오는 일상의 맥섹슈얼라이제이션에 빠졌다.”

(출처: 여성신문)



지금껏, 그리고 아직도 여성 연예인은 언제나 예쁘고 얌전한 인형이기를 요구받아왔다. 

그들의 몸은 조각조각으로 카메라에 담겼고,

그들의 사생활은 과한 상상과 추측으로 뒤덮여 그들에게 씌어졌다. 


모 예능에서는 선을 넘는 질문을 하는 출연진 때문에 여성 연예인이 눈물을 보였는데, 

언론에서는 여성 연예인을 겨냥해 방송 분위기를 흐렸다고 조롱하는 말들을 가감없이 기사화했다.


그것을 막아야 할 언론은 

오히려 앞장서면서 배를 불렸고

그 누구도 본인이 하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모르게 만들었다. 


설리씨의 경우, 나이 많은 남성 배우에게 00씨라고 했다는 것으로 

연예매체뿐 아니라 공중파에서도 마치 중요한 뉴스처럼 확대 보도 되었다. 

딸뻘인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들에겐 ‘능력 있다’라고 평가하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인 것 같은 뉴스였다. 



 악플이 다가 아니다

설리씨의 사망 이후 댓글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설리씨가 사망한 데에는 

댓글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언론은 댓글 규제만이 답인 것처럼 프레임을 좁혀버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여성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던 의식의 문제이며, 

그런 의식에 한 발 앞장섰던 언론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댓글에 모든 책임을 미뤄버렸다. 


언론 비평매체인 <미디어오늘>에서는 구하라씨와 관련된 보도 자료 1년 치를 분석했고, 

“언론은 악성 댓글을 기사로 확대재생산했다.”고 결론지었다.


지금 당장 바뀌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 큰 아픔과 분노를 겪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여성 연예인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구하라씨에 대한 언론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폭행 사건이었지만, 언론 매체는 구씨가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나 2차 가해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는 ‘누가 잘못했나’의 대결 구도로 프레임을 만들었다. 단순히 흥미를 끌기위한 기사에 불과했고, 그것이 여성 연예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어 보였다. 



최종범씨는 ‘최 모씨’나, ‘전 남자친구’로 이름조차 숨겨졌지만 그의 주장은 

구씨보다 더 많은 기사로 인용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손쉽게, 화살을 구씨에게 돌렸다. 


구하라씨가 폭행사건을 용기 내어 말했을 때도, 그리고 사망했던 시점에도 관련 ‘동영상’을 실시간 검색어에 올려놓는 모습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의 죽음이지만 이다지도 무관심할 수 있는 건, 마치 상품처럼 소비하던 습관 때문일까. 



 ‘사회적 연쇄살인’ 


24일 밤에 SNS에는 연쇄살인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했다. 

‘사회적 연쇄살인’.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벼랑끝으로 내몰았다.

무엇이 그들을 내몰았을까.


언론의 위상이 아무리 하락했다 해도, 아직까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적어도 지극히 사소하고, 혹은 사람의 치부가 될 수 있는 문제들을 기사화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바뀔 수 있다. 잘못된 사회현상을 제대로 꼬집어내는 본래의 언론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언론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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