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포르투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어.
여기서만큼은 걱정이라는 걸 할 필요도 없었고,
매일이 영화 같아서 현실인가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였거든.
그런 나의 시간들 중에도 특별한 날들이 있었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곳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게 된 거야.
제이는 나에게 언젠가 중남미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어를 배워둘 필요가 있다고 했어.
그렇게 그가 찾아준 나의 스페인어 과외 선생님은 ‘Chimo’였어.
치모는 스페인 발렌시아 사람으로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지만,
동물을 너무 좋아해서 지금은 동물원에 일하고 있는 친구였어.
치모와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 반씩 공부를 하게 되었어.
술 마실 때나 쓰는 은어,
상대를 위협하는 못된 말,
아주 기본적이고 간단한 말밖에 못 하는 나.
제이가 영어는 절대로 안된다고 한 탓에 수업은 무조건 스페인어로 진행되었어.
수업하는 중에 손짓 발짓을 써야 했고 미리 공부해가지 않으면 진도가 나가지 않았어.
치모와의 스페인어 과외는 내 귀를 열어줬어.
여전히 말하는 건 어눌하지만 듣는 건 눈치껏 알아듣게 되었어.
사실 외국어가 가장 빨리 느는 방법은 술이라고 생각해.
없던 용기가 생겨서일까 과감하게 외국인과 소통이 되거든.
치모에게 배운 스페인어와 맥주 한잔이면 천하무적이 되었어.
나는 돈을 주고 치모에게 공부를 배웠지만 나중엔 내가 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치모는 나랑 과외하는걸 무척이나 재미있어했거든.
“크리스티나(기면 씨의 영어 이름), 너는 내가 하는 한국인들이랑 다른 것 같아.
내가 아는 한국 여자애들은 수줍음이 많던데.
넌 전혀 안 그래. 너무 재밌어. 와하하하”
어떤 날은 치모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어.
치모는 식사에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와인을 건넸어.
한식으로 준비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지.
그때 치모가 제이에게 말했어.
“크리스티나는 타잔처럼 말해.
예를 들어 나는 슬프다를 말할 때, (Estoy triste.)
나 슬픔.(Yo triste.)이라고 말해. 와하하하!”
헤헤 이 새끼..
또 다른 특별한 하루의 시작은 어느 옷가게의 방문으로부터였어.
포르투갈 현지 친구 마리아와 함께 옷가게들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날이었지.
어떤 골목에 있던 옷가게였는데 알고 보니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였어.
독일인 여자 친구와 함께 포르투갈에 살고 있다는 료스케 씨는 동양인인 나를 보자 무척이나 반가워했어.
심지어 내가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엄청 좋아하더라고.
료스케 씨와 영어와 일본어, 포르투갈어를 섞어서 이야기를 나눴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료스케 씨는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어.
가게를 돌아다니며 바지와 티셔츠, 재킷, 모자, 신발 등을 가져왔어.
그리고 내게 내밀며 입어보라고 했어.
‘뭐지? 이렇게 입혀놓고 사게 만들려는 속셈인가..?’
우선은 입어보라는 마리아의 눈짓에 료스케 씨가 가져다준 옷을 입어봤어.
옷을 입고 나오자 료스케 씨는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려도 되겠냐고 물었어.
나는 당연히 상관없다고 대답했지.
료스케 씨는 고맙다며 선물로 예쁜 자수가 놓여있는 작은 수건을 주었어.
그리고 료스케 씨는 재밌는 제안을 하나 했어.
“내 여자 친구가 디자이너거든.
혹시 피팅 모델해볼 생각 있어?
하루 잠깐이면 돼! 아마 널 보면 되게 좋아할 거야!”
너무 평화로워서 아주 가끔은 지루하고 무료한.
그런 나날에 재밌는 일이 될 것 같아서 료스케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제이는 스냅 촬영을 하러, 나는 피팅 모델을 하러 집을 나섰어.
그가 나와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에 나를 담는 것에는 익숙해졌어.
하지만 상업적인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어쩐지 부담되고 어려운 일이었어.
그래도 제이가 “재밌겠다! 해 봐:) 어디서도 못 할 경험이잖아.”라고 등 떠밀어 준 덕분에 즐기자며 긴장을 덜 수 있었지.
스튜디오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어.
약속시간에 맞춰서 도착하자 료스케 씨의 여자 친구이자 디자이너인 스벤자씨가 반갑게 맞이해줬어.
자신이 론칭한 브랜드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설명해줬는데, 온통 영어인 탓에 기억나는 건 없어.
이야기를 끝으로 바로 옷을 갈아입고 촬영을 시작했어.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촬영은 야외에서 이루어졌어.
촬영은 3시간 동안 이어졌어.
조용한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촬영을 했어.
중간에 스튜디오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야외 촬영을 하러 나갔지.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었고, 진짜 모델도 아니었지만 이 특별한 경험을 즐기는데 문제는 없었어.
한국에서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포르투갈에서 하는 거잖아.
지나가는 차들,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촬영을 구경했어.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한 풍경일 것 같아.
동양인이 잘 없는 포르투갈에 동양인이 촬영을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몸에 와 닿을 때마다 괜히 부끄러웠어.
에라 모르겠다.
즐겨야지, 모델인 것처럼.
하루 동안의 모델놀이가 끝이 났어.
꽤 재미있었어.
그리고 느낀 점도 있었지.
역시 그의 카메라 앞이 아니면 싫다고.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은 그의 카메라에만 담기는구나 라고 생각했어.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해 먹고,
그가 일을 하러 나가면 나는 장을 보러 가고,
그가 올 시간에 맞춰 저녁을 만들어 놓고,
저녁이면 누구든 초대해 와인을 마시고.
그런 평화로운 하루에 특별한 하루들도 더해져 버리니 더욱 애정이 깊어질 수밖에.
이 포르투라는 도시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