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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씨 Jun 30. 2019

제이와 로저 선생님

카디프

5살, 이제 막 언어를 배울 시기에 만난 그의 생에 첫 선생님.

로저 선생님은 그의 집에 찾아와 영어를 알려주고 동화를 읽어주셨대.

어른이 된 제이가 영어 선생님이 되었는데, 어렸던 제이를 가르친 영어 선생님이라니.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궁금했던 분이었어.

22년 만에 그의 은사를 함께 만나기 위해 카디프에 도착했어.




도착한 카디프는 온통 회색 먹구름으로 가득했어.

당장이라도 천둥번개가 칠 것만 같은 하늘이었지.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우울한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어.

제이와 로저 선생님이 22년 만에 만나는 특별한 날인데 날씨가 눈치가 없었어.

버스에서 내리자 누군가 후다닥 잰걸음으로 다가왔어.

로저 선생님이었어.


“You’re just same as when you’re young!”

(“넌 어렸을 때랑 정말 똑같구나!”)


눈치 없는 날씨 때문에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로저 선생님의 차에 올랐어.

영어를 잘 못하는 통에 로저 선생님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

영어를 못할 땐 뭐다?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웃는 거지!

헤헤 바보 같은 표정으로 선생님에게 말했어.

“I am Christina:-D”

바보처럼 웃고 있는 내 표정을 본 제이가 로저 선생님에게 말했어.

“She’s not good at English.”("얘는 영어 잘 못해요.")


어렸던 제이와 젊었던 로저 선생님.


로저 선생님의 집에 짐을 풀고 저녁을 테이크아웃하러 나왔어.

영국에 왔으면 피쉬 앤 칩스를 먹어줘야지.

집으로 돌아와 사 온 음식을 차렸어.

도란도란한 분위기에 로저 선생님도 들떠 보이셨어.

저녁을 먹고 나니 자연스레 술자리가 이어졌어.


역시 술을 마시면 용기가 생기는지 영어가 술술 나왔어.

문법도 어순도 다 틀렸지만 신나게 떠들어 댔지.

로저 선생님은 즐거워했어.

하하하 웃으시며 내게 말씀하셨어.

“You’re much better at English with alcohol”

(“너 술 마시니 영어 잘한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제이가 통역을 해줬어.

로저 선생님과의 대화는 주로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어.

지금처럼이나 말을 잘하고 장난꾸러기였다는 제이.

내가 모르는 그의 모습을 그의 은사님을 만나 직접 듣는 기분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이었어.


제이는 어린 시절 사진(위의 사진)과 똑같은 자세로 로저 선생님과 사진을 찍었다.


로저 선생님을 위해 뭘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맛난 저녁을 지어 드리는 거였어.

제이와 버스를 타고 카디프의 시내로 가서 장을 봐왔어.

돼지고기, 마늘, 양파, 달걀 등.

장 봐온 것으로 요리를 시작했어.


쌀을 불리는 동안 재료를 손질했어.

불린 쌀로 냄비밥을 하면서 동시에 미역을 볶았지.

미역국을 끓여내고 고추장으로 양념을 만들어 제육볶음을 했어.

김치는 없으니 사온 채소로 겉절이를 만들었어.

딱 맞게 고슬고슬한 냄비밥이 지어졌어.

달걀찜을 끝으로 그럴싸한 한식이 차려졌어.


로저 선생님은 산타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지었어.

“WoW!”

자율배식으로 접시에 먹을 만큼의 밥을 덜고 반찬을 담았어.

로저 선생님은 연신 “딜리셔스! 맛있으!”를 말하셨어.

물론 영어로 말씀하셨지만 난 저렇게 들었어.

늘 소식하신다는 로저 선생님도 꽤 많이 드셨어.

맛이 나쁘진 않았나 봐.


제이는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오는 로저 선생님과의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저녁상을 치우고 바로 술자리를 가졌어.

로저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시고 술도 잘 마시는 주당이셨어.

로저 선생님네 집에 머무는 매일 밤 우리는 술을 마셨어.

매일 밤 와인 3병이 기본이었지.

“으아 취한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로저 선생님은 백개먼이라는 보드 게임을 들고 오셨어.


Bankgammon.

우리나라의 윷놀이나 오목, 바둑 같기도 한 외국의 주사위 놀이야.

사실, 나도 이날 처음 본 거라서 게임 규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와 진짜 엄청 중독성 있더라고.

몇 게임이나 제이에게 지고서 로저 선생님에게 한 게임하자고 했어.

그러자 로저 선생님은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다고 말씀하셨지.

내 생각에 선생님은 훈수 두는 게 더 재미있으셨나 봐.

그리고는 제이랑 내가 아웅다웅하는 걸 손주 보는 듯 바라보셨어.


로저 선생님은 혼자 카디프에 사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다람쥐와 새를 관찰하시고,

오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셔.

그런 그의 하루에 우리가 있어서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어.

로저 선생님은 집안이 북적거리고 생기 있으니 엄청 좋아하셨어.


어렸던 제이는 어른이 되었고, 젊었던 로저 선생님은 멋진 백발의 신사가 되셨다. 선생님과 제자가 나이를 함께 먹어간다.


그에게 물었어.

“어때? 로저 선생님을 만난 기분이?”

“내가 어렸을 때는 엄청 크다고 느꼈거든?

그런데 지금 만나니 너무 작으시다. 하하.”

“어릴 땐 뭐든 크게 느껴지는 법이잖아.”

“되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어.

22년 만인데 말이야.”


우리는 다음 날 제이의 추억을 쫒아가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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