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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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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주 Dec 04. 2019

작은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도록

MBC 뉴스데스크 <소수의견>으로 다짐하다

방송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라고 방송법 제6조 제5항은 규정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언론이라면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고 그들이 겪은 부당한 일을 공론화시키고, 그 원인을 찾아 문제 제기해야 한다. 그런데도 MBC 뉴스데스크는 굳이 <소수의견>이라는 코너를 따로 만들었다. 언론의 필수적 역할을 소재로 삼은 코너의 탄생엔 분명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언론의 기본을 향한 다짐이길   

<소수의견>의 첫 방송은 '우리 주변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듣고, 대신 따져 묻겠습니다.'라는 멘트로 시작됐다. 그들이 선언했듯 <소수의견>이라는 코너는 사회적으로 미약한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진중히 전하는 언론의 기본적 역할을 향한 뉴스데스크의 다짐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본적'이라지만 지금까지 방송은 소수자를 향한 세심한 보도를 기본으로 삼지만은 않았다. 방송은 소수자의 곁에서 작은 목소리를 키워주는 데 힘을 써야 했음에도 권력의 옆에서 소수의 의견은 그들의 입맛 따라 뭉개고 비틀었다. <소수의견>은 그랬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소수 의견을 듣고 전하겠다는 성찰이 담긴 코너라고 멋대로 바라본다. 그렇다면 과연 MBC 뉴스데스크의 <소수의견>은 첫 화의 선언과 나의 바람처럼 정말 소수의 의견을 크게 듣고, 대신 따져 묻고 있을까.

   

작은 목소리를 크게 듣고, 대신 따져 물었던 첫 화     

2018년 여름, <소수의견> 첫 화는 택배 아르바이트 도중 숨진 대학생 김 군 사건을 짚었다. '우리 주변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듣고, 대신 따져 묻겠습니다'라는 멘트가 적절할 만큼 꼼꼼한 보도가 이루어졌다. 죽음이 왜 발생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적절한 처벌은 이루어졌는지 하나하나 따져 묻고 그 답을 찾았다. 김 군을 사망으로 이르게 한 누전 사고는 접지시설과 누전차단기가 설치되지 않아서 발생한 것임을, 기기를 설치하지 않은 건 기업의 수익 극대화를 위한 욕심 때문이었음을, 원청기업인 대한통운이 하청기업에 비해 약 1/10 뿐인 과태료를 내게 되는 구조 등 사건 속 숨겨진 연결고리까지 속속들이 보도했다. 

보도는 김 군 사건에서 그치지 않았다. 구의역 사건 등 이전에 발생했던 하청노동자 안전사고와 연결 지어 계속된 사고에도 책임자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한 법률은 진척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까지 꼬집었다.

    

단순 보도에 그친 최근 화     

지난 10월 27일, 가장 최근에 방영된 <소수의견>은 일명 ‘잠실야구장 노예사건’이라 불린 장애인 학대와 노동착취 사건을 다뤘다. ‘잠실야구장 노예사건’도 따져보아야 할 질문들이 많았음에도 굳이 따져 묻지 않은 채 보도를 마쳤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피해자가 12년 동안 본인의 돈을 빼앗긴 채 배를 굶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지낸 장애인 학대사건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이 일으킨 문제는 무엇이었나? 기초생활 급여와 장애수당이 형이 아닌 당사자에게 올바로 지급되도록 하는 제도는 없었는가? (국민일보에 따르면) 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밝혔으나 지적장애라는 이유로 무시되었으며, 오롯이 형의 말이 반영된 온정주의적 판결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판결을 받은 다른 장애인 학대 사건은 없었는가? 그러하다면 이러한 판결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수의견>이 피해자 대신 따져 물을 수 있던 질문들이다. 어느샌가 <소수의견>의 오프닝 멘터에 ‘대신 따져 묻겠습니다’가 빠졌다. 그처럼 <소수의견>의 날카로운 질문들도 사라졌다. 내용이 평평해진 만큼 보도 시간도 확연히 줄었다. <소수의견> 첫 화는 5분 55초인데 비해 가장 최근 화는 2분 23초에 그쳤다. 묻혀있던 소수의 의견을 듣고 이를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게 만들 때 본연의 역할을 다 해낼 수 있을 테지만 그저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라고 짧게 보도를 끝냈다. 방영일은 돈을 횡령한 형을 ‘자립 도왔다’는 이유로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지 3개월이 지난 후였다. 시의성이 지난 사건을 깊은 분석이나 세심한 접근 없이 단순 보도만 내보낸다면, 굳이 <소수의견>이라는 코너로 따로 빼서 보도할 이유는 희미해진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찾아주길        

<소수의견>을 정주행 하며 느낀 건 더 깊숙한 소수의견이 더 정기적으로 담겼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소수의견>은 하루 건너 다음 화가 나오기도,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후 다음 화가 방영되기도 하는 등 방영 시기가 불규칙하다. 매주 뉴스로 담아낼 소수의견을 찾는다면 무한할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언론에서 비춰지지 않던 작은 목소리를 찾아내어 이를 공론화시킨다면 <소수의견>의 존재 의미는 더욱 뚜렷해지지 않을까 싶다. 정기적으로 소수 의견을 담아낸다면 이러한 작은 목소리들이 더 많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 9월 1일 자 <소수의견>이 다룬 국가보훈처 사회복지사 처우 문제의 경우,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라는 기관에 비해 사회복지사의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이를 포착하여 MBC 뉴스데스크로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 것은 <소수의견>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화였다. 이렇듯 <소수의견>에게 기대하는 건 기존 뉴스에서 들리지 않던 미약한 목소리를 새롭게 포착하고 방송이라는 큰 목소리로 소수자를 대신하여 물어주는 역할이다.     

2008년부터 7년간 진행됐던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시위를 기억한다. 고압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한전과 주민들의 갈등이 벌어졌다. 주민의 대부분은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차갑게 이어져 갔었다. 타지 사람들에게 밀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서서히 알려졌고, 밀양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함께해준 그들은 밀양 할머니들에게 외로웠던 싸움을 밝혀주는 따뜻한 빛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할머니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소수를 위한 방송은 없었고, 큰 힘을 이용해 작은 목소리를 손쉽게 왜곡하고 함께하는 목소리들을 ‘외부세력’이라는 이름으로 훼손했다.      

이 사건 외에도 방송이 흉기가 됐던 날들이 존재한다. 그날들을 기억하며 언론이 소수를 향하기를, 특히 <소수의견>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는 하나의 다짐으로 기능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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