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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작가 Feb 07. 2024

‘척’하는 집

애물단지와 플로리다에서 신혼생활

 

 2년 동안 상자에 갇혀있던 나의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장식품들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 드디어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어렸을 때는 나만의 방이 없었고 두바이 있었을 때는 룸메이트랑 공간을 함께 썼는데 이제야 나를 위한 편안한 공간이 생겼다. 이젠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 집을 꾸밀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설렜다.


하지만 애물단지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한 명당 23킬로씩 두 개의 캐리어를 가지고 갈 수 있는데 이걸로는 어림없었다. 이미 남편은 미국으로 출국을 한 상황이었다. 원래 부모님이 우리가 신혼집을 꾸미고 난 후 오시기로 했는데 짐 때문에 고민하는 날 보시더니 두바이에서 힘들게 여기까지 가져왔는데 후회되지 않게 원하는 거 다 챙겨서 같이 가자고 하셨다. 이렇게 부모님이 도와주신 덕에 거의 100킬로 가까운 짐을 가져갈 수 있었다. 나의 애물단지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이민 가방에 넣고 나서야 필요한 짐을 챙겼다. 뭔가 앞뒤가 바뀐 느낌이 들지만 이때 나는 세상을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비행을 하면서 전 세계 도시에서 사 온 기념품들로 신혼집을 보기 좋게 꾸밀 수 있을 거 같았다.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꿈이 현실로 조금씩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일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돼서 뭔가 이상했다. 역시나 좋은 일은 이렇게 연달아 일어나지 않나 보다. 항공사 직원 티켓으로 구매해서 위탁 수화물이 딱 애틀랜타까지만 가능했다. 플로리다 게인스빌까지 위탁 수화물을 다 가지고 오면 초과비용이 어마 무시했다. 다시 짐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며 미국에 있는 남편과 통화하는데 남편이 선뜻 애틀랜타까지 밴을 빌려서 오겠다고 했다. 거의 10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온다는 남편 걱정은 뒷전이었다. 다행히도 짐을 그곳까지 가져갈 수 있어서 기뻤고 이김에 애틀랜타를 부모님과 함께 여행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절대 이런 터무니없는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때의 난 전혀 이성적이지 않았다. 애물단지 때문에 차량 렌트비뿐만 아니라 남편은 저녁에 잠도 못 자고 긴 시간을 야밤에 운전해서 왔다.     


 이제는 정말 내가 원하는 공간이 생겼다. 방이 2개 그리고 화장실 1개 큰 거실과 부엌까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가구는 침대와 책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나의 오브제들을 위한 진열장과 선반을 사야 했다. 바로 집에 도착한 다음날 2시간을 달려 올랜도에 있는 이케아에 갔다. 너무나 다양하게 꾸며진 멋진 인테리어를 보면서 우리 집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지갑이 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남편은 최대한 원하는 걸 해주고 싶었는지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찬성했다. 부모님도 들떠 있는 나를 자제시키지 못하셨다. 예상했던 비용보다 2배 정도는 초과됐지만 기쁜 마음으로 결제했다.     


 30살이 넘어서야 온전한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난 어렸을 때부터 경험했다. 아빠 사업이 어려워서 한동안 지방에 계셨을 때는 달랑 두 개 있는 방 중 하나를 세준 적도 있다. 삼 남매와 엄마 이렇게 4명이 한방에서 잤다. 그 좁은 방에 책상 세 개가 있었고 짐을 다 쑤셔 넣으면 딱 누울 공간만 남았다. 5명이 1개의 화장실을 사용했기 때문에 최대한 눈치껏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다. 이런 어려움과 아픔이 나를 일찍 철들게 했고 덕분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꿈이 조금씩 실현되어 갔다.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살고 싶었던 난 미국에서 드디어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남편과 나의 신혼집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의 물건은 거의 없었다. 그 공간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 건 대부분 내 물건들이었다. 공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여백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나에게 의미 있는 물건들로 채워야지만 내 공간으로 느껴졌다. 가지각색의 오브제들이 큰 거실에 하나씩 하나씩 진열되면서 그제야 나만의 공간이 완성됐다. 건축 전공인 남편은 공간 활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신혼 때였던 만큼 온전히 나에게 맞춰주었다. 솔직히 그는 여러 개의 진열장을 조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공간은 인테리어 테마 따위는 없는 애물단지를 진열하기 위한 곳일 뿐이었다. 단지 욕심으로 만든 답답한 공간이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만든 나만의 컬렉션 박물관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했을 때는 집들이했을 때, 딱 그 순간뿐이었다. 다양한 장식품에 관심을 가진 손님들에게 어디 나라에서 샀는지와 물건의 히스토리를 얘기하며 그 순간을 즐겼다. 나를 위해 이 물건을 가지고 온 것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욕심이 컸던 거 같다. 이런 공간에 대한 집착은 한 달이 지나니 무뎌졌다. 지인들도 더 이상 이 물건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 또한 관심이 시들어져 갔다. 이렇게 나의 애물단지들은 또다시 버려졌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애장품들은 또다시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이사 후에는 가장 애정하는 물건들 몇 가지만 진열했다. 그 당시 남편과 나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거실에 있는 물건들은 정말 말 그대로 예쁜 쓰레기가 됐다. 딸 나엘이가 태어나면서 아이 용품들로 집안을 채우면서 어쩔 수 없이 남아있던 장식품들도 상자 속으로 사라졌다. 놀라운 건 그 이후 난 이 상자를 연 적이 없다. 벌써 14년 전이다. 상자 그대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져왔고 사정상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그 상자는 친정집에 보관해 두었다.           

 엄마에게 장식품들로 집안을 꾸미는 걸 제안했지만 이미 친정집은 다른 물건들로 포화상태였다. 이번에 부모님이 이사를 하면서 짐들을 가져가라고 했지만 치앙마이에 오게 되면서 아직도 여전히 친정집에 보관 중이다. 이제는 어떤 물건들이 상자에 들어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이러다가 딸에게 애물단지를 처분하게 될까 봐 걱정된다. 마음이 멀어졌지만 사랑했던 추억 때문에 애인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지만 나의 시간들을 머금고 있는 오브제들을 쉽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물건에 집착을 했을까. 기념품을 사야지만 여행한 나라에 대한 기억이 더 소중하게 간질 될 거라 생각했다. 구매하고 싶은 욕구를 그럴듯한 변명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자질구레한 기념품을 사는 대신 실용품을 샀으면 잘 사용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쓰라린 과거 덕분에 이제는 여행을 가더라도 기념품 하나 사지 않는다. 최대한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려 노력하고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려고 한다.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이제는 경험에 우선순위를 두며 그때의 감정을 글로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사진과 함께 글을 쓰며 간직한다. 그러면 항상 그 행복한 순간과 함께 하게 된다.     

 행복했을 때보다 마음이 아프면 물건에 더 집착하게 된다. 평안한 마음을 위해 긍정적인 사고로 삶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매일 3가지씩 감사한 일을 적어보는 걸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럼 공간을 물건으로 가득 채우지 않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챙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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