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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리께 Dec 09. 2022

어쩌다 보니 온통 초록

<루꼴라를 때려 넣은 볼락 파스타 & 딜 범벅을 한 그라브락스>  

 약속 시간은 오후 두 시. 하지만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친구의 메시지. 나는 조리를 멈추고 샐러드에 쓸 채소를 다듬기로 한다. 모둠 채소에 포도 몇 알과 블랙 올리브, 체다 치즈, 으깬 아몬드를 넣으면 꽤 괜찮은 샐러드가 된다. 아무래도 연말의 모임은 파티의 성격을 띠므로 이때의 요리들도 파티에 어울리는 것들로 준비하는데, 오늘은 샐러드와 함께 그라브락스, 볼락 파스타를 내놓을 예정이다.

 제임스 셜터의 <위대한 한 스푼>은 요리의 오리진, 식재료에 얽힌 일화와 역사, 그리고 그 요리를 식탁에 낼 당시의 사연 등을 레시피와 엮은 책이다. 그의 요리책을 읽다가 호기심이 생기는 메뉴가 보이면 귀퉁이를 접어놓곤 했는데, 마침 약속이 잡힌 와중에 '그라브락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라브락스는 냉장고랄게 따로 없던 시절에 생연어를 오래 두고 먹기 위해 만들어진 북유럽식 요리. 연어는 얇게 저민 후 사워크림과 캐스퍼를 곁들여 생으로 먹는 게 일반적인데 염장과 숙성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그라브락스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연어는 한 입 크기로 이미 잘라져 나온 것 말고 덩어리로 된 것, 그리고 최대한 도톰한 것으로 골라서 손바닥 크기로 등분해 놓는다. 넓은 접시에 굵은소금 3스푼, 황설탕 1스푼, 보드카 1샷(보드카가 없다면 청주), 레몬 껍질 간 것 약간, 그리고 한 움큼의 딜에서 줄기 부분만 뜯어내서 잘게 다져 넣은 후 손가락으로 버물버물한다. 이 위에 잘라놓은 연어를 얹고 4면에 골고루 양념을 발라준다. 한 덩어리가 끝나면 그 위에 다른 덩어리를 얹고 역시 양념을 발라가며 샌드위치 형상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덩어리들을 랩으로 꽁꽁 싸매 냉장고에서 최소 5시간 이상을 숙성시킨다. 이렇게 염장과 숙성을 거치면 비교적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연어살에 탄력이 생겨서 먹을 때 고들고들하니 식감도 좋다. 연어야 원체 잡내가 없는 생선이긴 하지만 그마저도 딜과 레몬 덕분에 말끔히 사라진다. 

 나는 6시간 후 랩을 벗겼다. 겉의 양념들을 털어내고, 줄기 부분만 사용하고 남은 딜의 이파리를 잘게 다진 후 그 위로 연어 덩어리들을 데굴데굴 굴린다. 딜의 이파리들이 덩어리에 들러붙는 과정에서 싱그러운 향이 마구 흩뿌려진다. 덕분에 온 집안이 딜의 향으로 가득해서 기분이 좋다. 묻히는 작업을 끝낸 덩어리를 칼로 얇게 저며 접시에 놓는 것으로 마무리. 그라브락스는 그냥 먹기보다 소스와 곁들이면 맛이 훨씬 다채로워지는데, 나는 이케아에서 파는 연어 소스에다가 시중의 사워크림을 1대 1.5 비율로 섞어 사용했다. 여기에 레몬 반개를 착즙하여 넣었더니 새콤 달콤 담백한 소스가 완성되었다.




 식사로는 새우와 볼락을 넣은 루꼴라 파스타를 준비한다. 어쩌다 보니 전 메뉴에 해산물이 쓰였는데, 오늘 함께할 친구 중 한 명이 육식을 하지 않는 까닭이다. 초대손님의 식성, 알러지가 있는 음식, 그리고 개인적인 신념으로 먹지 않는 음식 등을 파악해두면 메뉴를 선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전에 한번 여러 명의 손님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한 명은 채식주의, 한 명은 당뇨, 한 명은 대장내시경을 앞둔 시점이라 모두가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는데 힘듦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집을 찾아와 주고 나의 음식을 맛나게 먹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고마운 일이다. 힘듦은 있겠지만 귀찮거나 번거롭지 않다.

 다시 파스타로 돌아와서, 루꼴라로 파스타 소스를 만든다. 상추만큼 루꼴라도 품종이 다양하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먹는 루꼴라는 대부분 '로켓샐러드'라는 종이고 가니쉬로는 '와일드 루꼴라'를 사용하기도 한다. 뿌리째 수확하는 로켓샐러드는 얼핏 열무처럼 생겼다. 동그랗고 큼직한 잎은 부들부들하며 맛이 고소해서 줄기째 넣어도 무리가 없는 반면 잎이 뾰족한 와일드 루꼴라는 향과 쓴맛이 강해서 한가득 사용했을 때는 혀가 아릴 수 있다. 나는 소스로는 '로켓샐러드' 그리고 가니쉬로는 '와일드 루꼴라'를 사용할 참이다. (물론 한 품종으로 사용하여도 전혀 무리 없다) 로켓샐러드 220g에 아몬드 10알 정도, 마늘 2~3개, 버진 올리브 유 1/3컵, 소금을 약간 넣고 갈아준다. 이 정도의 양이면 여러 번을 쓸 수 있다. 면은 링귀니에서 막판에 스파게티 면으로 바꿨다. 링귀니는 넙데데한 면적에 소스가 듬뿍 묻어나서 파스타의 풍미를 한껏 살려주는 장점이 있지만 쉽게 퍼지기 때문에 많은 양의 파스타를 조리할 땐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비교적 덜 퍼지는 스파게티면이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 끓는 물에 면을 넣고 6분가량을 삶아둔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은 편으로, 페페노치노는 다져서 넣는다. 마늘이 황금색을 띠면 새우를 넣고 빨갛게 익을 때까지 볶는다. 그리고 면과 면수를 약간 넣고 볶다가 루꼴라 소스를 3큰술 넣는다. 불을 끄기 직전에 와일드 루꼴라 한 움큼을 넣고 함께 버무리면 조리는 끝.

 면을 삶고 팬에서 볶는 와중에 레인지의 한 구에는 또 다른 팬이 올려져 있어야 한다. 볼락을 구워야 하므로. 파스타에 올린 것으로는 향과 맛이 너무 강한 생선보다는 대구나 볼락처럼 어느 맛에도 조화를 잘 이루는 것들이 좋다. 1인분에 반 마리씩, 총 네 덩이를 파스타 조리가 끝날 때를 맞춰 앞뒤 노릇하게 구워낸다. 파스타볼에 면을 담고 그 위에 구운 볼락을, 그 위에 팬에 남은 루꼴라 소스를, 그 위에 와일드 루꼴라를 가니쉬로 올리면 파스타는 완성된다. 




 식탁에 차려놓고 보니 온통 초록이다. 막상 음식이 한 가지 색으로 맞춰지니 맛있어 보이기보다는 식욕이 살짝 가시는 느낌. 그동안 친구들을 불러 밥을 해먹일 때 웬만하면 이전의 메뉴와 겹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으니 그때마다 사진을 찍어 기록을 해둘 정도로 메뉴 선정에는 신경을 쓰는 편인데, 지금처럼 메뉴 간 색상 조합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기껏 정성 들여 조리를 했는데 결과가 이러니 아쉽고 맥이 풀어진달까. 그나마 접시 한 편에 놔둔 붉은빛의 비트가 포인트가 되어주어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다른 이들은 화이트 와인을, 나는 술 대신 물을 채워 건배했다. 친구 커플은 장거리 연애를 하는 중이다.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거리. 한 번은 건너오고, 한 번은 건너가야 볼 수 있는 사이. 각자가 만들 수 있는 최대치의 휴일을 끌어모아 일 년에 서 너번을 만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만나면 둘이 있는 순간이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할꼬. 그래서 이들은 새벽까지 활용할 정도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낸다고. 1분 1초가 아까운 그들이 시간을 쪼개어 찾아와 줬는데, 메뉴가 온통 초록 맛이라 나는 속상하다. 좀 더 다채롭게 준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왕 차려진 거 웃으며 즐겁게 식사를 즐기는 게 그들의 시간에 대한 예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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