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노 Jul 31. 2024

달리기 하는 여자

달리다 보면 어딘가 도착하겠지


평범한 재즈카페 주인이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 중계를 보다가 문득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날이었다. 내가 마주했던 5년 전 9월 19일도 그랬다. 조금도 특별할 것 없던 바로 그날, 달리기라는 세계의 문이 열렸다.
'아무튼 달리기' 김상민



2017년 6월 조금도 특별할 것 없던 어느 날 방탄에 입덕했던 것처럼, 2024년 6월 21일 아주 평범했던 그날에 나는 달리기라는 세계의 문을 열었다.


운동을 놓은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2년 넘게 한 필라테스는 지겹고(수많은 필라테스 옷은 어쩌지) 복싱은 처음부터 재미가 없었다(3개월 수강권을 한꺼번에 끊는 게 아니었어). 예약이 필요하거나 정해진 시간을 맞춰야 하는 운동은 번거로워서 꺼려졌다.


코로나 기간에 아무튼 달리기라는 책을 통해 런데이(run day) 앱을 알고 있었는데, 동생이 런데이를 통한 달리기를 먼저 시작하게 됐다.


동생은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같이 달리자며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다. 같이 뛰자, 나중에 마라톤 같이 하자, 해외 마라톤 대회 같이 신청하자 등등 걷기도 힘든 내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늘어놓았다.


동생에게 달리기가 좋아서 해외 마라톤까지 섭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다가, 방탄 덕후인 나 자신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덕후들은 왜 그렇게 열정적일까. 어쩜 그렇게 깊게 파고들까. 그 행동 패턴이 나를 설명하는 것 같아 귀엽고 재밌게 느껴졌다.





첫날 나는 아무 운동복이나 걸쳐 입고 런데이의 '30분 달리기 도전'이라는 훈련 프로그램을 선택해 달렸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8주에 걸쳐,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런데이 앱이 시키는 대로 5분간 걸으면서 웜업, (1분 달리기+2분 걷기) 4세트+1분 달리기, 5분간 걸으면서 쿨다운. 이렇게 총 23분을 운동했다. 고작 1분을 인터벌로 다섯 번 달렸을 뿐인데 땀이 났다. 혹시 나도 달릴 수 있는 사람인 건가?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운동을  반년 동안, 나는 동네 산책로를 틈만 나면 걸었다. 주말 아침엔 당연히 걸었고, 평일 저녁에도 퇴근 후 걸었다. 운동할 마음으로 걷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팔을 앞뒤로 열심히 흔들면서 걷지 않았다. 어떤 날은 축 처진 어깨 그대로 걷고, 어떤 날은 터덜터덜 걸었다. 어느 날은 방탄 음악을 듣고, 어느 날은 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 걸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숨 쉴 구멍으로서 걷기를 선택했던 것 같다. 파란 하늘, 초록색 식물, 약간의 흙,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일상의 피곤함, 고단함 같은 걸 털어냈던 것 같다.



달리면 모든 게 단순해진다. 아무리 무거운 고민이라도 달리기 시작하면 점차 그 부피가 줄어든다. 몸이 바쁘게 돌아가니 평소처럼 복잡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다. 우선순위 정렬 버튼을 누른 것처럼 중요치 않은 것들은 자연스레 생각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마음 한가운데에는 고민의 본질만이 남는다. 그렇게 본질과 직접 대면하면 생각보다 쉽게 고민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걷기로는 쉽게 되지 않았는데, 달리는 동안에는 정말이지 모든 게 단순해졌다. 아 이제 뛰는구나. 이렇게 숨을 쉬니 숨 쉬기 편하구나, 오늘은 어깨가 조금 무겁구나, 오롯이 내 몸에만 집중하게 되는 느낌이 꽤 괜찮다. 딴생각이라고 해 봐야 집에 가서 샤워하고 에어컨 바람 맞으며 거실에 드러눕는 상상을 하는 정도? 신기할 정도로 달리는 시간 동안엔 단순해다.



신발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불길은 금세 머리끝까지 옮겨 붙었다. 러닝화 바깥의 영역은 취향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러닝 삭스, 팬츠, 긴팔과 반팔 티, 바람막이, 헤어밴드까지. 각자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면 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달리기는 소비의 상한선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한정판에 열을 올리지 않는 이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색을 맞추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진 않는다. 게다가 아웃렛이라는 비빌 언덕까지 존재한다.



첫날 달리기를 마친 후, 내 무릎은 소중하니까 무릎 보호대, 핸드폰을 들고 뛰기 거추장스러우니 벨트 파우치. 이렇게 두 가지를 쇼핑했다.


몇 번 더 뛰고 러닝화를 사고, 몇 번 더 뛰고 러닝용 반바지와 반팔 티를 두 세트 샀다. 발목을 잡아주는 러닝 양말도 샀구나. 그동안 내가 받은 1:1 필테스 가격을 생각하면 약소한 쇼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한다. 사랑에 빠지면 내가 어떤지 너무 잘 알아서, 방탄의 피가 흐르는 덕후는 추가의 러닝화를 검색하다가 사랑을 조절하며 창을 닫았다.


인터벌로 4분을 달리는 5주차 러너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의문이 든다. 정말 8주 뒤가 되면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상태가 될까? 이 호감이 사랑이 되어 계속 지속될까?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오늘도 그냥 달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