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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 Sep 26. 2024

유럽 여행 중에 공황 증세가 나타났다 1

천국에서 만난 공황 장애

지난주에 십 년 만에 두 번째 공황 증상이 왔다. 안타깝게도 나는 가족들과 유럽 여행 중이었고, 새로운 숙소에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도저히 실내에 들어갈 수 없었다. 폐소 공포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주말 피렌체엔 사람이 너무 많았고 내 머릿속엔 더 많은 생각들이 드글거렸다. 터져 나오는 울음, 한국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비행기 타는 상상 만으로 옥좨오는 숨,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죽음.




이번 여행은 그동안 딸을 키워준 고마운 엄마를 위한 효도 여행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일정도 가능한 느슨하게 짜고, 숙소도 좋은 곳으로 골랐다. 그런데 프랑스 니스 숙소의 주차장에서 공포가 시작됐다. 숙소는 널찍한 리조트형인데 주차장은 열 대 쯤 주차할 수 있는 매우 낮고 좁은 공간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도 철문으로 쾅 닫히는 시스템이라서 열쇠 중 하나의 버튼을 눌러야 철문이 열렸다. 그런데 처음에 우리 가족은 그 시스템을 몰랐다. 주차장 입구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다른 차가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갔다. 우리가 주차해야 하는 공간도 매우 좁은 칸막이 창고로 되어 있었다.


먼저 들어온 차 주인은 차를 주차하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와 딸과 엄마는 남편이 주차하는 동안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차장의 모든 불이 꺼졌다. 좁고 낮고 어두운 공간에 갇혔다는 생각에 너무 놀라서 패닉이 왔다. 내가 어떻게 그랬나 모르겠다. 숨을 고르고 핸드폰으로 스위치를 찾아서 불을 켰다. 남편은 주차하느라 불이 꺼지는지도 몰랐다고 했고 내 상태도 몰랐다. 나는 주차장 입구로 달려가 마구 손을 흔들었다. 그랬더니 쾅하고 철문이 열렸다. 아마도 손을 흔들면서 내가 갖고 있던 열쇠 버튼이 눌려서 열린 것 같다.


불이 꺼진 순간이 20초쯤 됐으려나. 나와 딸과 엄마는 모두 너무 놀라서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헥헥 댔고, 남편만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때부터 공황 증세가 시작됐던 것 같다. 나는 증세를 여행 내내 미세하게 느꼈지만, 이 좋은 숙소에서 이 좋은 풍경을 보며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티 내지 않았다. 니스에서 피렌체로 넘어가기 전날 렌터카를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에 조금 더 심한 증세가 나타났다. 밴으로 된 대형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남편은 택시 기사가 우리가 숙소로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간다면'이 사람 딴 데 가는 거 아냐?'라고 지나치듯이 말했는데, 딸이 '엄마 무서워'라고 말했다.


'엄마 무서워'는 니스 주차장에서 불이 꺼졌을 때 딸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얼어붙었다. 숨이 막혔지만 차분히 택시 기사에게 에어컨을 좀 더 세게 틀어 달라고 말했다. 창문을 열고 싶었는데 그 택시는 뒷좌석에선 창문이 열리지 않는 형태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내 상태를 이제는 가족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여보 나 지금 숨을 못 쉬겠어. 공황이 온 것 같아. 나 좀 도와줘. 나 좀 어떻게 해줘'라고 말했다. 누가 제일 놀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가장 먼저 내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남편과 딸이 따라서 내 팔다리 어깨 목을 주물렀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택시에서 내려서 인지 나는 다시 약간 안정이 됐다.


니스 여행을 하는 내내 그 주차장 때문에 마음이 떨려서 남편만 주차장에 보내곤 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주차장에 다신 안 가도 된다는 사실에 이젠 괜찮겠지 했는데 택시에서 또 그런 걸 보면 아니었나 보다. 그 뒤로 첫 문단에서 쓴 진짜 공황 증세가 나타났다. 피렌체 숙소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으니 남편이 예약한 식당에 가기로 했다. 남편이 엄마를 대접하려고 예약한 좋은 식당이었다. 그러나 내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메뉴판을 받자마자 나와야 했다. 그 와중에 나는 거기 직원에게 내가 아파서 지금 식사를 할 수 없다고 일일이 설명을 했다.


식당에서 나와서 구글맵을 켜고 약국을 찾았다. 가까운 약국에 가서 파파고를 통해 이탈리아어로 '공황 증세가 왔어요. 우울증 약을 한국에서 복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약사는 좀 심각한 표정으로 어떤 물약을 줬다. 식물성이니 많이 먹어도 다면서 30방울씩 먹고 그래도 안 좋으면 더 먹어도 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약을 먹고 길거리에 몇 분 앉아 있었으나 알 수 있었다. 나는 병원엘 가야 했다. 다시 구글맵을 켜서 응급실을 찾았다. 도보 8분 거리에 Santa Maria Nuova Hospital이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미 밤이었고 응급실로 향했다.


약국에서 말한 것보다 더 상세히 적어서 이탈리아어로 설명을 하고 접수를 하고 기다렸다. 끊임없이 이곳저곳이 쳐서 실려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 순서는 계속 뒤로 밀렸다. 나는 반복적으로 내가 지금 숨을 못 쉬겠다고 했다. 한 시간쯤 기다리며 딸과 엄마는 대기실에 두고 응급실 안쪽에 남편과 앉아 있었다. 우는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그랬다. 계속 꺽꺽대고 울었다. 곧 죽을 것 같은데 옆에 있는 남편은 해줄 수 있는 것 하나 없고, 나는 죽겠고, 계속 죽는 것만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 의사가 나를 만나주었다. 의사는 친절했고 영어를 잘했다. 내가 개떡 같은 영어로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고 '내가 이해한 게 맞나요?'라고 다시 물어봤다. 한국에서 먹는 우울증 약을 물어보길래 이름을 하나하나 말했고 의사가 알고 있는 약인 듯 했다. 의사는 주사와 약 중에 뭘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즉시 괜찮아질 수 있게 내 혈관에 주사해 달라고 말했다. 그 뒤론 간호사가 와서 심전도 같은 걸 체크하는 것 같았고 바로 주사해 줬다. 그렇게 3시간쯤 응급실에 있다가 나왔다. 나는 의사에게 여러 번 고맙다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안아주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처방전을 들고 나온 시간이 11시였는데 문을 연 약국이 가까이에 있었다. 하나님께 몇 번을 감사해야 하는 삶인지. 약사는 처방전을 보더니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이런 이런 약이 맞는 거죠?' 우리나라 약국처럼 한포 한포 나눠주지도 않아서 어떻게 먹는지도 몰랐다. 알약과 물약이었는데, 물약이 더 효과가 빠를 것 같아서 물약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올 수 있었고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 무사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어났다.


효도 여행이었는데, 그 뒤로는 불효 여행이 되었다. 티는 안 냈지만 엄마는 계속 내 걱정하느라 완전히 즐기지 못하시는 듯 보였다. 나는 나대로 물약이 독한지 자꾸 토해서 알약만 하루에 세 번 먹으면서 버텼다. 버텼다고 쓰긴 하는데, 사실 괜찮았다. 그냥 보통 사람 같이 놀고 먹고 할 수 있었다.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근데 입장을 바꿔보니 내 딸이 그랬다면 나는 당장 한국으로 가자고 했을 것 같다. 엄마도 당장 한국으로 가자고 하시긴 했다. 내가 괜찮다고 우겨서 남은 4일을 채웠다.


그렇게 남은 여행을 약간 아쉽게 마치고, 도저히 못 탈 것 같던 비행기를 열몇 시간이나 편안히 타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오자마자 내가 다니던 병원에 가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약을 증량하고 한참을 상담했다. 십 년 전에 공황 증세가 왔을 때는 자동 세차장에 들어갈 때였는데 그때는 이렇게 강하게 오지 않아서 공포감이 오래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사실 많이 다르다. 주말을 잘 쉬었고 약을 잘 챙겨 먹고 다시 이렇게 출근해서 일하고 있지만 무섭다.


아침에 버스에 타지 못할까 봐 무섭다. 엘리베이터나 지하도로에 진입하거나 화장실 칸이 너무 좁은 것 같으면 긴장된다. 피렌체에서 느낀 공포가 너무 커서 마음에 잔상이 많이 남은 것 같다. 한 번도 무섭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나를 약간 긴장시킨다. 약간이라 괜찮다고 쓰고 싶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어떻게 공황 증세를 극복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처음으로 환우 모임 같은 것에 관심이 간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네이버 카페를 하나 가입했는데 너무 부정적인 글만 보여서 탈퇴했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루틴을 밟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다름이다. 공황 증세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영어 공부, 일어 공부, 승진, 돈벼락. 다 필요 없고, 오늘을 그저 평온히 잔잔히 건강히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 12살 딸이 내가 공황 온 거 보고 놀랐을 텐데, 병원 가는 길 내내 내 팔과 어깨와 목을 주물러 주면서 말없이 옆을 지켜준 걸 잊을 수 없어서라도 더 잘 살아야겠다. 딸에게 너무 고마워서 그날 생각만 하면 눈물 줄줄 흐른다.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공부하고 알아보고 노력해서 다시 겪지 않도록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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