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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 Jan 05. 2024

회사에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잘한 걸까


이 세상에 절망할 일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같은 일을 두고도
어떤 이들은 벼랑 끝으로 가고
어떤 이들은 벼랑 끝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서 이따금 슬픔 만을 느낀다.
한낮의 우울 p.76 - 앤드루 솔로몬



2023년의 여름, 프리스틱과 아빌리파이와 자나팜을 복용하며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벼랑 끝으로 가는 사람이었다. 끈질기게 들러붙은 우울증도 여름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느 날 인사부 A과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병가를 내고 싶은데 조건이 어떻게 되나요?
본인 건강을 사유로 단축 근무가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어떤 서류가 필요한가요?


A과장은 정성껏 답변을 해줬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진단서가 전부였다. 고민이 됐다. 몇 가지 질문들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아픈가? 그렇다. 너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나? 그렇다. 그렇다면 회사에 우울증이라고 알리는 일은 잘하는 짓일까? 모르겠다.



몰랐지만 일단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써달라고 했다.



환자분은 우울감, 무기력감의 증상으로 내원 중인 분으로 본원에서 약물 치료 및 상담 치료 중입니다. 최근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심해진 상태로 증상의 완화를 위해 2개월 가량의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3년간 나를 지켜봐 온 의사는 2개월의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써 주었다. 본인 경험상 두 달 이상을 쉬면 회사로 복귀하기 힘들다며 일단 두 달을 쉬어보자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상의를 했다. 회사에 알리는 게 잘하는 짓일까? 남편은 주변에 우울증으로 병가 낸 직원이 몇 있다고 했다. 병가를 사용하고 돌아와서 우울증으로 아팠다고 본인이 얘기해서 알았다고 했다. 다들 주변에 얘기한다고? 내가 내 병을 너무 크게 생각하고 있나? 과하게 의식하는 건가?

 


다음날 진단서를 들고 출근했다. 이걸 인사부에 보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나는 다시 질문했다. 나 지금 너무 아파서 일할 수 없는 지경이야? 그렇다. 나는 인사부 A과장에게 서류를 보냈다.



그날 오후 A과장에게 연락이 왔다. 인사부에 정신건강을 사유로 병가나 단축근무를 요청했던 케이스가 처음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내 증상이 어떤 것인지 말해줄 수 있겠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수천 명이 다니는 회사에 정신병 환자가 나밖에 없다니. 조금 놀라웠고, 알린 것이 약간 후회됐고, 다들 어떻게 숨기고 사는지 궁금했다.


 

무기력해서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슬퍼서 죽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불안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자꾸 눈물이 납니다. 블로그에 매일 적었던 구체적인 증상들을 떠올렸다. A과장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왜일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데. 어딘가 찢어지고 부러지고 피 흘리는 것과 똑같은 일이 내 정신세계에 일어나고 있는데.



체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간단히 답변했다. A과장은 부서장과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부서 사람들이 몰랐으면 한다고 말했다. A과장은 부서장에게는 알릴 수밖에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대신 부서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도록 부서장에게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부서장과 면담이 잡혔다. 부서장은 내 손을 잡으며 얼마나 힘들었냐고 말했다. 그 말이 무척 거슬렸다. 누가 나를 불쌍하게 여겨달랬나. 니가 뭔데 나를 동정하냐. 다정한 말에도 내 두뇌는 이런 결론을 전달했다. 나 정말 쉬어야 하는구나. 나 정말 아프구나 느꼈다.



면담 끝에 3개월간 하루 4시간만 일하기로 했다. 단축 근무는 일 년까지 쓸 수 있으니 3개월을 지내보고 그 후의 일은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냈고 서서히 상태가 괜찮아져서 종일 근무로 복귀했다.



복귀 후 이따금 불안하다. 부서장을 보면서 '저 사람은 내가 우울증인걸 아니까 내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저 사람에게 약점을 잡혔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우울증이 곧 나는 아닌데 내 전체를 간파당한 기분이 든다. 업무적으로 바뀐 것도 없고 오히려 바쁘게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래도 불안하다. 나 부서장에게 잘 보이고 싶나 보다. 작년에 승진했으니 몇 년 동안은 부서장을 너무 의식 안 해도 되잖아.



사람들이 여기 오는 데도 나름의 힘이 필요하다? 용기가 없으면 병원에 올 수가 없어. 수치심을 이기고 여기로 오는 거야. 다르게 살고 싶어서.
데이, 이브닝, 나이트 p.101 - 김금희



나는 살고 싶어서 쉬었다. 지금처럼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다르게 살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 수치심은 넣어두자고 다짐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어폰을 꽂고 거실 탁자에 앉아 이 글을 쓰며 가족들을 바라봤다. 남편은 내 주위를 돌며 청소기를 돌리고 있고 딸은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저 남자는 내가 우울증인 게 괜찮나? 우리 딸은 엄마가 우울증인걸 알면 어떠려나. 생각이 많아진다. 별별 인간이 다 있는 세상에 우울한 인간 한 명쯤 더 있어도 괜찮겠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들을 처리해 본다.



그래도 다시 궁금하다. 회사에 말한 거 잘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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