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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 Jan 02. 2024

지루하고 비루한 일을 잘 견디는 인간으로서

재수사 - 장강명


오랜만에 2권짜리 장편 소설을 완독 했다. 살해당한 주인공이 나와 같은 학번이고 대다수의 등장인물이 또래였다. 인물대학생 때 다니던 종로 회화 학원, 듣던 노래, 읽은 책, 놀았던 동네 같은 게 비슷해서, 맞아 그랬지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때 저희는 모두 실제 저희들보다 더 크고 멋있는 것을 연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민소림이랑 유재진은 누가 더 미쳤나를 겨루는 것 같았고요. 조금 똑똑한 이십 대들한테는 세상이 다 우스워 보이죠. 상식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자기가 더 대단해 보인다고 믿고, 허세 부리고. 저는 그때 그 모임에서 저 빼놓고는 다 머리가 어떻게 된 애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저도 그렇고 다른 아이들도 그렇고, 다 모범생들이었던 거 같아요. k-모범생. 모범생스럽게 십 대를 보낸 게 부끄러워서, 그걸 감추려고 필사적이었던 것 같아요.
p.335 (1권)



소설에는 실제보다 더 크고 멋있는 것을 연기하려고 애쓰는 시절이라고 20대를 묘사하고 있다. 나 역시 남을 의식하고 연기하느라 20대를 다 써버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 경우엔 지나치게 가난했고 아빠가 술주정뱅이였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그 사실을 감추는 게 지상 과제인 듯이 모범생으로 살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다정한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처럼 굴었다. 기억나지 않지만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롭지 못한 가정과 몸과 마음을 괴롭히던 가난은 아무 때고 삐져나왔다. 아빠가 자신을 아직도 애기 취급한다며 투덜거리는 동기의 말을 듣고 그 동기를 미워했다. 가족들과 같이 홋카이도에 놀러 간다는 다른 동기의 말을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연지혜는 사십 대가 된 그들의 이야기가 어딘지 공허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찾는지 모르면서 뭔가를 찾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헤매는 것 같았다. 이십 대에는 그러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사십 대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니 니체니 떠들어보았자 그들의 삶이 충만하거나 만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영화감독, 국제기구 직원, 공방 주인처럼 연지혜의 또래들에게는 외견상 그럴싸해 보일 직업들을 가졌기에 그런 빈틈이 더 도드라지게 드러나 보이는지도 몰랐다. 또는 그들이 자신들의 다음 세대에 대해 은근히 우월감을 드러냈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p. 54-55 (2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마음 상태는 돈을 벌고 결혼을 하면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20대에 상상한 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공허하고 불안하다. 가끔은 내 마음속에서 텅텅 소리가 난다. 내일이 무섭다.



글쎄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 벌써 두개골 골절 후유증 온 건가.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중에 제일 근접한 말은 '성실함'이에요. 지루하고 비루한 과정을 참고 견디는 자세죠. 거대하지만 실체가 있는, 실제적인 목표를 향한. 그 목표에 가는 길이 느리게 꾸역꾸역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 길을 걷는. 저는 그게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상당수 현대인은 장소에 따라서도 정체성을 바꿔야하죠... 하지만 저한테는, 언제 어디서나 너는 누구냐, 너는 뭘 할거냐, 너는 왜 그 지경이냐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늘 같아요. 저는 안 풀리는, 하지만 꿈은 거창한 영화감독이죠. 저 같은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요. 그런데 최소한, 잘 부서지지는 않아요.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지루하고 비루한 일을 잘 참고 견디며 성공 전망은 낮지만 그렇다고 잘 부서지지도 않는 사람으로서, 저는 제가 같은 부류를 잘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어요.
p. 375-377 (2권)



하지만 나는 이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을 견디는 성실함을 가졌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주어진 일을 끝내고 만다. 이를 악물어야 했고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참아내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20대처럼 허세 부리며 뭔가를 향해 내달리고 싶다. 나는 성실하니까, 그렇게 해도 잘 부서지지 않지 않을까.



연지혜는 불쑥 '1990년대 가요 명곡 모음'이라는 키워드를 유튜브에 검색해 음악을 들었다. 민소림, 구현승, 김상은, 주믿음이 젊었을 때 거리에 울려 퍼졌을 노래들을 들어보고 싶었다... 노래들은 어딘가 들뜨고 낙천적인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자신은 부모들과 다른 존재라고, 세상을 다 알고 있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그걸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게 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부르고 즐길 만한 멜로디와 가사였다. 그 서툶과 해맑음이 우습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p.397 (2권)



방탄소년단의 RM은 Still Life라는 노래에서 '과건 가버렸고 미랜 모르네'라고 썼다. 김연수 작가는 '진주의 결말'이라는 소설에서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라고 말했다.


재수사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내 20대와 현재의 나와 알지 못하는 미래로 나를 데려갔다. 숙제를 해야 하는데 답을 모르는 꿈,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강의실을 못 찾는 꿈, 학교에서 친구가 아무도 없는 꿈을 여전히 꾸는 현재의 나. 


꿈속에서 굉장히 힘들고 슬프다. 하지만 이건 꿈일 뿐이다. 2024년엔 달까지 태양까지 혹은 어떤 희망까지 닿을 수 있다는 듯이  보려고 한다. 지루하고 비루한 일을 잘 견디 잘 부서지지 않는 인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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