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사 - 장강명
그때 저희는 모두 실제 저희들보다 더 크고 멋있는 것을 연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민소림이랑 유재진은 누가 더 미쳤나를 겨루는 것 같았고요. 조금 똑똑한 이십 대들한테는 세상이 다 우스워 보이죠. 상식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자기가 더 대단해 보인다고 믿고, 허세 부리고. 저는 그때 그 모임에서 저 빼놓고는 다 머리가 어떻게 된 애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저도 그렇고 다른 아이들도 그렇고, 다 모범생들이었던 거 같아요. k-모범생. 모범생스럽게 십 대를 보낸 게 부끄러워서, 그걸 감추려고 필사적이었던 것 같아요.
p.335 (1권)
연지혜는 사십 대가 된 그들의 이야기가 어딘지 공허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찾는지 모르면서 뭔가를 찾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헤매는 것 같았다. 이십 대에는 그러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사십 대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니 니체니 떠들어보았자 그들의 삶이 충만하거나 만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영화감독, 국제기구 직원, 공방 주인처럼 연지혜의 또래들에게는 외견상 그럴싸해 보일 직업들을 가졌기에 그런 빈틈이 더 도드라지게 드러나 보이는지도 몰랐다. 또는 그들이 자신들의 다음 세대에 대해 은근히 우월감을 드러냈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p. 54-55 (2권)
글쎄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 벌써 두개골 골절 후유증 온 건가.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중에 제일 근접한 말은 '성실함'이에요. 지루하고 비루한 과정을 참고 견디는 자세죠. 거대하지만 실체가 있는, 실제적인 목표를 향한. 그 목표에 가는 길이 느리게 꾸역꾸역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 길을 걷는. 저는 그게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상당수 현대인은 장소에 따라서도 정체성을 바꿔야하죠... 하지만 저한테는, 언제 어디서나 너는 누구냐, 너는 뭘 할거냐, 너는 왜 그 지경이냐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늘 같아요. 저는 안 풀리는, 하지만 꿈은 거창한 영화감독이죠. 저 같은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요. 그런데 최소한, 잘 부서지지는 않아요.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지루하고 비루한 일을 잘 참고 견디며 성공 전망은 낮지만 그렇다고 잘 부서지지도 않는 사람으로서, 저는 제가 같은 부류를 잘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어요.
p. 375-377 (2권)
연지혜는 불쑥 '1990년대 가요 명곡 모음'이라는 키워드를 유튜브에 검색해 음악을 들었다. 민소림, 구현승, 김상은, 주믿음이 젊었을 때 거리에 울려 퍼졌을 노래들을 들어보고 싶었다... 노래들은 어딘가 들뜨고 낙천적인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자신은 부모들과 다른 존재라고, 세상을 다 알고 있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그걸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게 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부르고 즐길 만한 멜로디와 가사였다. 그 서툶과 해맑음이 우습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p.397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