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교에서 우리는 책을 읽는 거의 유일한 아이들이었다. 백일장에 자주 동원됐고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내가 글 쓰는 일에는 흥미와 끈기를 보이는 걸 신기하게 생각했다. 백일장이 예고되면 방과 후 문예반 교실에 모여 글짓기 연습을 했고 며칠이 지나 보면 주찬성과 나만 남아 있곤 했다. 하바나 눈사람 클럽 p.155 - 김금희
초등 6학년의 나와 김혜성은 텅 빈 교실에서 글짓기를 했다. 짙은 초록 칠판에 커다랗게 적힌 단어 하나를 바라보며 뭐라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우리는 학교를 대표해서 어떤 글쓰기 대회에 나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우연히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서 김혜성은 그냥 잘 쓰는 아이라서 선택되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매일 모였다. 글쓰기 선생님은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중년 여자분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책상에 앉으면 봄이나 학교, 전화 같은 성의 없는 단어를 칠판에 적고 사라졌다. 둘만 남은 교실에서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났으려나. 나는 할 일은 꼭 해야 하는 고지식한 아이였으므로 숙제처럼 써 내려갔다. 내가 쓴 문장을 읽으며 'oo야 이렇게 쓰지 말라고 했지'라고 했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잘하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진 않았던 것 같다.
한 학기가 지나고 둘만의 방과 후 수업이 끝났다. 대회에서 김혜성은 대상을 받았고, 나는 참가상 격인 장려상을 받았다. 우리는 언제 그런 시간을 보냈나 싶게 데면데면한 채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생이 되어 복도에서 마주친 김혜성이 한마디를 툭 던지며 지나갔다. "누가 널 좋아하는데 너는 절대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일걸." 그래서 뭘 어쩌라고. 나는 갑자기 웬 친한 척인가 싶었다. 며칠 뒤 학교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3층 교실 창문에서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한준현! oo 지나간다. oo야 한준현 여기 있어!" 한순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황급히 실내화를 갈아 신고 교실로 들어갔다. 김혜성이 말한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인물이 초등학교 동창 한준현이라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김혜성과는 가끔 마주치면 '한준현이랑은 잘 돼 가냐?' 같은 말을 일방적으로 듣는 관계를 계속했다. 잘 돼 가기는. 한준현은 초등학교 때부터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였다. 김혜성이 한준현을 끌어다가 내 앞에 세워둔 적도 있었는데 더 어색해질 뿐이었다. 한준현은 우리 집 편지함에 편지를 두고 가고, 오가다 만나면 얼굴이 벌게지면서도 끝내 사귀자는 말을 하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준현이나 나나 똑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을 상상하지는 못하는, 그냥 그런 중학교 1학년생들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송이와 단짝이 되었다. 송이의 재밌는 점은 금사빠라는 점이었다. 그때까지 현실의 남자애들에게 관심을 못주던 나와 달리 송이는 3학년 일 년 동안에만 a와 b와 c와 d를 좋아했고 매번 고백했다. 그때마다 송이는 나를 메신저로 이용했다. 우리는 보안을 위해 남자애들을 별명으로 불렀는데,별명은 아주 일차원적으로 지었다. a는 이름에 지읒이 들어가서 (쾌걸)조로였고, b는 병아리처럼 생겨서 얄리, c는 이름이 강산이어서 마운틴이었다. 그리고 나는 d를 손쉽게 벌레 새끼라고 지었다. d가 김혜성이었기 때문이다. 한준현 일로 당한 게 있어서 그랬는지 송이가 김혜성을 좋아하는 게 싫었는지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르고 싶었다. 송이는좋아하는 사람을 벌레 새끼라고 부를 순 없다고 버텼다. 우리는 버그로 타협했다.
송이는 나와 김혜성이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점을 반가워했다. 한 학기 동안 같이 글짓기를 했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럼 많이 친한 거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내가 김혜성과 친한가. 나는 친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송이는 그날편지 전달을 명했다. 나는 편지를 들고 김혜성의 교실로 갔다.
김혜성과 나는 캄캄한 운동장에 그어진 트랙을 따라 걸었다. 춥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혜성이 교복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뭔가 다 어색하게만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원형의 트랙은 끝이 없었다. 그 핑계로 계속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손을 잡고 걸었다. 방금 송이의 편지를 전한 참이었다. 분명 장난스럽게 시작된 것 같은데 어쩌다 어두워지도록 그런 분위기로 걷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다음날 나는 김혜성과 사귀게 되었다고 송이에게 솔직히 말했다. 송이는 한동안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김혜성과 송이와 나는 고스란히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송이는 고등학교에서도 금사빠였고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 더욱 열심히 그녀의 메신저 노릇을 했다. 그리고 김혜성과의 연애도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처럼 잘 되질 않았다. 뭔가 할 때는 해서 어색했고 안 할 때는 안 해서 어색했다.
아침 7시까지 학교에 가서 밤 9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독서실에 가서 자정이나 새벽 두 시까지 공부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우리는 학교 복도나 독서실에서 잠깐씩 보는 사이였다. 남자를 사귀는 게 이렇게 별거 없나 싶었다. 그렇게 심심하게 몇 달을 지내다 헤어졌다. 대체 나와 김혜성은 어떤 말을 주고받으며 시작했고 어떤 마음까지 도달했다가 끝난 걸까.
대외적으로 나와 김혜성은 몇 달 사귄 게 전부였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헤어지고 김혜성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사귀는 동안에 김혜성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송이는 가끔씩 내가 김혜성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닌지 확인하는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미끼를 물지 않았다. 같은 반 남자애에게 고백을 받기도 했지만 관심이 가질 않았다.고등학교 3년 동안 매일 조금씩 김혜성을 더 좋아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우리는 물리적으로 멀어졌다. 대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김혜성에게 연락이 왔다. 술집에 앉아 마주 보니 이상했다. 술을 몇 잔 넘기고 우리는 처음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김혜성은 내게 왜 이제야 솔직하냐고 말했다. 진작에 이랬으면 우리가 안 헤어졌을 거라고도 말했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그날 나는 전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모두 쏟아냈다. 그리고 좀 나쁘게도 이제 막 좋아진 새로운 남자 친구가 있어서 미련 없이 돌아 나올 수 있었다.
오늘 김금희 작가의 '하바나 눈사람 클럽'이라는 단편 소설을 읽다가 김혜성이 떠올랐다. 초등 6학년부터 대학교 1학년까지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한 김혜성과 그에게 보냈던 마음을 어떻게 잊고 살았지. 김혜성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잘 지낼까? 이제는 알 길이 없으니 과거에게 물어본다. 잘 지내? 그러면 그때의 어린 마음은 잘 지내.라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