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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21. 2022

11. 우리 옛것과의 만남

'양주 회암사지'

또 하나의 왕궁     

옛 절터라니 잡목이 우거진 공터를 보게 되리라 했습니다. 웬걸요, 지레짐작은 보기 좋게 틀렸습니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는 널디 너른 터는 평지도 경사지도 아닙니다. 그 옛날, 계곡을 흙으로 메우고 석축을 쌓아 계단식으로 조성해 놓았습니다. 기다랗게 이어지고 차곡차곡 쌓인 석재들은 장관이었습니다. 말끔하고 번듯한 모습이 이제 막 터 다지기를 끝내고 대공사를 시작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양주 천보산天寶山 자락의 회암사지, 첫인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1997년부터 시작된 회암사지 발굴의 성과물은 2012년 개관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시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문헌 속 사찰 기록과 한국불교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세 승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회암사의 창건은 12세기 후반 이전으로 추정합니다.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 선사의 뜻을 따라서 1376년에는 그의 제자인 나옹선사가 중창하였고, 1472년에는 세조비 정희왕후가 중창하였습니다. 

한창때에는 총 262칸에 이르는 전각들과 17개 암자가 있었고, 모셔진 불상도 15척 크기가 7구, 관음상도 10척이나 될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빼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쌀을 씻는 함지박에 사람이 빠지고, 전국의 승려들이 너도나도 회암사에서 왔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많은 유구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대형 건물 단지를 알리는 주춧돌과 함께 3m 넘는 당간지주 3기, 대형 맷돌, 관솔불을 피워 불을 밝히는 정료대 5기, 괘불대 2기, 조각기법이 정교하고 문양이 화려한 6m 높이 부도탑이 절터를 지킵니다. 

세종 시절 무려 250명의 승려가 기거한 적도 있다니, 기도와 수행의 도량이라 해도 붐비는 장터 같이 떠들썩했을 듯싶습니다.   


회암사의 번영은 왕실의 후원에 기반합니다. 회암사가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고려시대를 지나 억불숭유 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에도 변함없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을 왕사로 삼아 회암사에 주지로 머물게 하고, 왕위에서 물러 난 뒤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은 회암사 중창에 관심이 각별했고, 명종 비, 문정왕후는 보우로 하여금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여 전국 제일의 사찰로 중흥시키려 했답니다. 기우제나 왕릉의 제사 등 왕실 행사를 치러온 회암사는 일종의 별궁과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회암사 가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궁궐에만 있는 월대가 있었고, 국내 최고의 온돌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큰스님의 거처인 방장을 공양왕이나 태조가 머물었던 정청의 양쪽에 배치하는 형식은 개성 만월대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전체 규모나 가람의 조영 기법을 보면 왕실에 소속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고 짐작이 든답니다.

가람 복원모형과 영상은 회암사의 위용을 실감 나게 했습니다.      

2005년에는 사면이 돌벽이고 바닥에는 박석이 깔린, 12개 기둥자리를 지닌 거대한 지하 석실 구조가 발견되었습니다. 음식 보관처나 창고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전통 뒷간의 저장 시설로 밝혀졌습니다. 흙덩이를 조사한 결과 기생충 흔적이 확인되었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찰의 공동화장실, 해우소 중에는 최대 규모로 동시에 20여 명이 이용했으리라 추정합니다. 발굴된 뒷간 터를 주제로 2018년에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전 <대가람의 뒷간>을 열었습니다. 과학적 분석이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수수께끼로 남았을 시설물을 통해 ‘버리고 비우는’ 일상을 엿볼 수 있었던 흥미로운 전시였습니다.   


10만 여점에 이르는 출토 유물들은 다종 다양합니다. 상당수 유물들에 명문이 새겨 있어 후원자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궁궐이나 왕실 관련 사찰에서만 쓰였다는 청기와, 용과 봉황무늬 기와, 용두, 토수, 잡상이 있습니다. 왕실 전용 자기를 생산하는 관요의 도자기는 편으로 출토된 경우가 많지만 명성에 걸맞게 최고급의 품질로 평가됩니다. 인도의 옛 언어이자 불교 경전의 원어인 범자를 문양으로 한 기와가 참 많이 보입니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알쏭달쏭해 보이는 범자가 당시 승려들에게 골치 아픈 제2외국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1565년 회암사에 봉안된 문정왕후가 발원한 불화들은 금화 50점, 채화 50점을 포함하여 총 400점인데 겨우 6점만 소재가 알려져 있답니다. 현재 회암사지박물관에는 모사도가 있고 국내에 남은 유일한 진본 <약사삼존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2000년에는 발굴 이후 처음으로 폐사지의 이름이 적힌 청동유물이 나옵니다. 명문은 1394년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회암사 보광명전 네 모서리 추녀 끝을 청동금탁으로 장식한다는 내용으로 태조, 신덕왕후 강 씨, 세자 방석의 후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익히 봐온 풍경보다 훨씬 큰 청동금탁이 회암사의 드높은 위상을 잘 보여줍니다. 진품 청동금탁은 용, 봉황무늬 기와들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실에서 전시 중입니다.   

  

절터에서 수습된 석조불상들은 모두 부서진 후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고의적인 파손은 유생들의 소행 이리라 추정됩니다. 대대적인 중수와 불교의 폐단, 승려들의 추문을 비난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넘쳤다는 기록은 회암사의 순탄치 못한 마지막을 짐작케 합니다. 명종 때 문정왕후가 죽고 유생들이 요승으로 불렀던 보우가 유배된 이후 풍상 속으로 인멸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사 새옹지마’, 우리네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회암사 옛 터에 불탄 종이 있다.” 1595년의 기록이 회암사의 끝도 첫 시작처럼 어느 때인지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려줍니다.

복원 과정을 거쳐도 온전치 못한 유물을 바라보며 유생들의 ‘반달리즘’을 생각해봅니다. 완형이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 위에 현실정치에서 느껴지는 암담함이 겹쳐졌습니다.


회암사지에서 위쪽으로 능선을 타면 또 다른 회암사를 만나게 됩니다. 1821년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며 작은 절을 지었는데 이때 회암사의 이름을 계승하고, 1922년에는 세 화상의 진영을 모시고, 1977년에는 법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합니다. 전각의 오른편 언덕에는 나옹선사승탑과 석등, 지공선사승탑과 석등, 무학대사탑과 쌍사자석등이 층층이 자리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추억하리라 싶습니다.      

200여 년의 영화를 누리다 사라지고 400여 년이 지나 되돌아온 회암사. 부침이 심했던 사찰의 운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오는 길, 나옹이 남긴 선시를 떠올렸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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