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a Jun 12. 2019

5. 오랜만이야, 9년 만에 만난 에펠탑

내가 파리에서 처음 만난 곳은 그 악명 높은 북역이다.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넣지 말아라,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낚아채 가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해라,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절대 대답하지 말아라,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해라. 나보다 파리를 먼저 겪은 사람들의 충고였다. 파리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의심과 경계로 무장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곳이라니. 그런 건 이미 한국에서도 질리도록 해오던 건데. 혼자여서 나눌 사람 없는 나의 불안은 무겁게 내 어딘가에 매달려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지하철로 숙소까지 이동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앱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기다리는 동안 캐리어를 바짝 끌어당기고는 초조하게 서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파리의 전경이 새삼 낯설었다. 파리는 9년 전에 온 적이 있다. 기억하고 추억하던 것들은 지나간 긴 세월 때문에 막연해진 지 오래였다. 기억에 남은 것은 아름다운 건물들이 만들어낸 가지런한 풍경, 그리고 단지 배경의 일부일 뿐이었던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 그런 잡히지도 않는 어렴풋한 것들을 꼭 쥐고 왔던 이유는 도망치는 장소가 낯설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택시기사와 만나 택시에 몸과 무거운 캐리어를 실었다. 앱으로 부른 택시여서 요금도 고정되어 있었고,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는 지도 알고 있었다. 내가 불어를 못한다는 걸 단박에 눈치챈 기사는 처음 만났을 때 친절히 웃으며 인사말을 건넨 것 외엔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서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움직이는 곳 안에서 바깥의 지나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보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자세는 사람을 느긋하게 만든다. 그렇게 창 밖을 천천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에펠탑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바로 그 에펠탑이었다. 파리의 상징이자 로망이자 제일 유명한 건축물, 혹은 파리의 로망을 상징하는 제일 유명한 건축물.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파리에서 제일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에펠탑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오래됐고, 크고, 반짝이고, 어디서나 눈에 띄니까. 좋고 싫고를 떠나서 에펠탑은 분명히 특별하다.


내 어렴풋한 9년 전의 파리에서의 기억들 중 가장 선명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에펠탑이 함께한 기억이다. 친구와 발 아프도록 오래 걷다가 도착한 에펠탑, 그 앞 벤치에서 앉아 먹던 샌드위치, 신나서 사진을 찍어대던 우리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도 특별한 어떤 것과 같이 녹아드는 순간 단단히 굳어져 원석처럼 남는다. 그건 반짝이면서 빛을 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창 밖으로 보인 그 에펠탑은 순식간에 나의 낯설음을 가져가고, 9년 동안 보관해두었던 원석을 건네주었다. 오랜만이야. 또 만났네. 그 날의 오후는 분명 흐렸지만 그 때 에펠탑은 반짝이면서 빛을 냈던 것 같다.


덕분에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한결 부드러운 마음일 수 있었다. 파리 15구의 어느 건물 앞에서 나는 캐리어 위에 걸터앉아 전화를 걸었다. 한 달 동안 머물기로 한 숙소는 파리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구한 곳으로 집주인은 싱가포르로 장기 출장을 떠난 상태였다. 대신 친구가 나에게 열쇠를 건네주기로 했고 그 친구는 내 전화를 받고 15분쯤 뒤에 나타났다.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파리에 와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사실과 영어로 이야기해야 된다는 생각에 나는 약간 긴장했다.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파리의 엘리베이터답게 무척 좁고 느려서 우리는 어색한 시간을 가까이서 참아내야 했다. 어쨌든 시간은 지나갔고 문은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방이 내 방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왜냐면 여기는 파리고, 난 파리에 머물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고, 상대방은 외국인이니까. 그냥 아, 네. 하는 평소 같은 반응은 지금 이 순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드라마 같은 데서 많이 본 어떤 극적인 서양식 리액션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그중 적당한 하나를 골라서 막 선보이려는 순간, 갑자기 요란하게 열쇠를 이리저리 쑤셔대는 상대방의 모습과 덜커덩 거리는 소리에 당황해 그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쇠를 여는 방법이 좀 힘들 거예요. 이리 와서 동영상으로 찍어놔요." 어딘가에서 산다는 건 제일 먼저 열쇠를 여는 방법부터 배워야 되는 그런 거였다. 드라마 같은 리액션이나 할 궁리부터 하는 게 아니라.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사진으로 봤던 것과 같았고 정돈되어 있었으며 깨끗했다. 방을 고를 때 제일 먼저 유의했던 것은 방을 빌려준다는 사람들의 말투였다.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메일이나 메신저같이 글자로 대화할 때 분명하고 깔끔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일을 같이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은 결과를 보여줬다. 그리고 뒤 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방을 빌린 집주인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내 판단력이 틀리지 않았구나 생각하면서 집을 사용하는 동안 유의해야 할 점들을 들었다. 설명이 끝난 뒤 그 사람은 파리 생활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서 웃으며 문 밖으로 나섰다. 고맙다고 잘가라고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니 혼자가 되었다. 천천히 걸어서 발코니로 가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비슷한 높이로 단정하게 늘어서 있는 높지 않은 건물들 덕분에 조금만 위를 올려다보면 바로 거기에는 밤하늘이 있었다. 그건 도시 치고는 꽤 넓게 펼쳐져 있는 밤하늘이었다. 거기에 별은 없었고 에펠탑도 보이지 않았지만 몇 개의 반짝이는 자동차 불빛과 거리의 조명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파리의 첫날밤이라고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4. 우울이 따라오지 않은 곳에서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