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히드로 공항을 빠져나와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건 완전한 밤과 어둠이었다. 런던 시내도, 호스텔의 방 안도 무척 조용하고 어두웠다. 소리 죽여 짐을 풀었다. 중국 우한에서 만난 반가웠던 사람들과는 진작에 작별했다. 이제 정말 혼자였다. 그래도 마지막에 속해있던 무리에서 받은 온기가 아직 남아서 많이 외롭지는 않았다.
같은 하루 안에서 나의 아침은 중국에서 시작됐고 밤은 영국에서 끝났다. 열 시간이 넘는 시차 덕이었다. 덕분에 하루를 덤으로 얻기도 했지만 하루에 욱여넣은 이틀 치의 고단함 때문에 피곤에 절여진 상태였다. 씻고 나서 이층 침대의 위로 올라갔다. 호스텔 예약 사이트의 리뷰대로 침대는 내가 뒤척일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 위에서 나는 삐걱대며 떠올렸다. 떠나오지 않았으면 지금 평소였을 한국에서의 나의 아침과 밤이 어땠을지를.
우울에 절여져서 출근이 하기 싫어서 울던 아침과 이대로 깨지 않았으면 하고 무거운 눈을 감던 밤이 이어지던 나날이 있었다. 명확한 하루의 반복이 괴롭고, 불투명한 먼 미래의 예측이 불안하던 날들의 아침과 밤. 문득 오늘 하루 동안의 아침과 밤에 피곤만 걱정하고 우울은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열세 시간이었다. 우울과 멀어지는 데 필요했던 시간. 여기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시간.
퇴사를 하자마자 정신과로 달려갔었다. 저 퇴사했고 다음 주에 파리에 가서 한 달 정도 있다 올 거예요!라고 얘기했을 때 선생님의 표정은 당황과 걱정 그 자체였다.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다정했지만 무작정 다독여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서 퇴사를 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을 때도 한 번도 그러라고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현실을 생각하라고, 퇴사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라고 했다. 회사를 벗어난다고 우울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에요. 준비되지 않은 다른 환경은 또 다른 불안이나 우울을 만들 수도 있어요.
퇴사는 의사인 선생님이 환자인 나에게 권장하지 않던 선택지였다. 그래서 퇴사와 여행 소식을 동시에 알리면서 나는 선생님의 눈치를 봤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좋은 거 많이 보고 잘 쉬다 와요. 그렇지만 여행에서는 항상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요. 자그마한 자극 하나도 큰 충격으로 올 수도 있고요. 혹시 모르니 비상약을 따로 처방해 줄게요. 기존에 먹던 약 용량의 2배 짜리에요." 그 날 병원을 나오면서 받은 한 달치의 약과 일곱 개의 봉투에 들은 비상약이 내 가방을 한가득 메웠다.
보통 내가 약을 먹는 시간은 아침 9시와 밤 9시였다. 출근 뒤 업무 시작 전 탕비실에서 사무실 전경을 바라보면서 매일 알약을 2개씩 삼키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자 우울의 시작이었다. 런던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하기 전, 시차 때문에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아침을 기다리면서 한참을 삐걱댔다. 사람들이 깨어날 만한 적당한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침대 밑으로 내려가 씻은 뒤 나갈 준비를 했다. 아침 8시였다.
딱히 목적지는 정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다만 시내 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회사도 많고 사람도 많은 그런 곳, 서울에서 매일 보던 곳과 비슷한 곳으로. 정장을 입고 자전거에 올라타 도로변을 따라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런던 시내의 풍경만이 서울의 모습과 다를 뿐, 출근 시간의 모습은 비슷해 보였다. 근처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 음료를 주문하고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자 이제 진짜 여행을 왔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을 때도 점원은 내 앞사람이 주문할 때와는 다르게 아주 느리고 또박또박한 영어로 말을 해 주었다. 걸어오는 사담도 없었다. 나와 완전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곳에서 나는 존재 자체만으로 이방인이었다. 그건 곧 이곳에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와서 아무도 모르게 떠날 수 있는 내 모든 행적은 내 기억 안에서만 기록될 테니까.
9시가 되자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고 나는 알약 두 개를 삼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 안의 한 손님은 개 한 마리와 함께였는데 그 개는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들면서 온갖 손님들의 냄새를 맡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 개가 갑자기 나한테 왔고 개의 주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어 보였다. 나도 따라 웃었다. 우울이 따라오지 않은 정말 오랜만의 아침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채로 하루 종일 런던을 쏘다녔다. 서점에 들어가서 표지가 예쁘거나 제목이 재미있는 책들을 전부 펼쳐서 훑어보았다. 잘생긴 점원은 책을 계산할 때 lovely day를 보내라고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런던답지 않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공원에 앉아서 쿠키를 먹었다. 좋아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 연극을 데이 시트로 싼 가격에 예매해서 관람했다. 옆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자기는 이 연극을 무척 좋아해서 몇 번이나 관람했다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나는 연극은 처음이지만 책은 몇 번이나 읽었다고 대답했다. 연극이 끝난 뒤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쫄딱 젖었지만 나는 즐거웠다. 오늘 하루 런던에서의 내 모든 발걸음이 바닥에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면 그건 분홍색 하트 모양이었을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과 모양.
이런 즐겁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정말 오랜만이어서 낯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웠다. 잊지 말아야지. 파리에서도 이렇게 행복해해야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유로스타 안에서 바라본 바깥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고 그 하얗고 쓸쓸한 풍경은 계속 열차와 함께 나를 따라왔지만 괜찮았다. 거기에 우울은 함께 따라오지는 않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