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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ena Jun 05. 2019

3. 최종 목적지까지 8,904 km

이건 가짜라고 치자. 비행기에서 내리기 10분 전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곧 중국 우한 공항에 착륙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내 방송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느긋했다. 이런 일은 아주 익숙하다는 투였다. 비행기가 착륙한 뒤에 만나게 될 세계의 모든 것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는 아주 쉽다는 듯이.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호텔까지 도착하는 길을 상상하는 것도 어려웠다. 무사히 도착한다고 해도 같이 다닐 사람이 없으면 다음 날 아침 떠나는 비행시간까지 방 안에 혼자 있을 생각이었다.

11시간이라는 긴 환승 시간을 감내할 수 있게 한 것은 거추장스러운 비자가 필요 없는 공짜 중국 여행이었다. 호텔에 혼자 처박혀서 보내야 할 긴 시간은 애초 기대했던 인내의 조건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모든 것이 생각하던 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명확히 다가오지도 않은 실패를 미리 예감하고 확정 지었다. 가짜라고 치고 싶었던 것은 파리 도착 전까지 예상되는 모든 실패였다. 내가 원했던 건 파리야. 여기는 그냥 지나가는 거잖아. 파리에서는 '진짜'처럼 할 수 있어. 여기서는 모든 것이 기대와 다르고 혼자 쓸쓸해도 괜찮아. 이건 가짜라고 치자.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항공사 직원이 커다란 팻말을 든 채 서있었고 그 근처에는 멀리서 봐도 한국인의 분위기를 내뿜는 사람들이 여럿 앉아있었다. 낯선 곳에서 한국인들이 모여있는 풍경을 보니 갑자기 안심이 됐다.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나도 그 풍경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갑작스러운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앉자마자 주변을 잽싸게 스캔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대화로 각자의 대략적인 관계를 자연스레 읽을 수 있었다. 전부 친구 아니면 커플이었다. 혼자로 보이는 사람은 나, 내 왼편에 앉아있는 여자, 오른편에 앉아있는 남자까지 셋 뿐. 어떤 무리 안의 혼자들은 보통 혼자가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들뜬 소리에 파묻혀서 잘 띄지 않는다. 더 깊숙하게 묻혀 버리기 전에 빠져나가야겠다, 생각하다가 옆 자리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혼자 여행 가시는 거예요?”

 

사실 처음에는 날카로운 인상이라고 생각해서 긴장했는데, 말을 걸자마자 표정이 둥글게 변했다. 그 둥근 표정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날카로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긁는다.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 표정 하나만 가지고 짧은 시간에 멋대로 확정했다. 맞아요 라는 대답을 들은 그 때 마침 항공사 직원이 혼자 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호텔 방을 같이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마음이 좀 급해져서 바로 말하는 바람에 약간 이상한 말이 튀어나갔다. “저랑 같이 자실래요?” 그렇게 나는 그토록 바라던 동행과 룸메이트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자그마한 성공 덕에 나는 조금 우쭐하고 뿌듯해졌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우리를 데려다준다는 자동차의 첫인상은 솔직히 장기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차처럼 보였지만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금세 내 머릿속에서 호박 마차로 둔갑했다. 어딘가 멋진 곳으로 데려가 줄 것 같은 호박 마차에는 나와 내 룸메이트 혜민, 그리고 두 쌍의 커플이 탔다.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조잘대고 있었다. 어떤 호텔로 가게 될지 궁금해요. 다들 런던 가세요? 런던만 가세요? 우한 시내 구경은 하실 건가요?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차로 5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도착한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을 기다리면서 우한 시내로 나갈 사람들을 모집했다. 내 룸메이트인 혜민이와 같이 차를 타고 왔던 커플 중 한 쌍이 파티원이 되었다. 서로 간단한 소개를 주고받았다. 국제결혼을 한 미국인 거스과 한국인 은아씨 커플이었다. 우한 시내에 대해 미리 조사해왔다며 정보가 빼곡히 적힌 노트를 펼쳐서 보여주었는데 무계획이던 내 눈에 그 노트는 마치 론리플래닛 우한 최신판처럼 근사한 여행책자로 둔갑해 보였다. 어제부터의 걱정이 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사람들이랑 엮어지다니. 우리는 한 시간 뒤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호텔의 방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넓었다. 우리는 공짜로 이 정도의 호텔에서 묵게 된 것에 감동했다. 하지만 우리의 감동은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와장창 부서졌는데, 급격하게 콧속으로 들어오는 썩은 냄새 때문이었다. 샴푸를 배수구와 변기에 들이붓고 거품을 잔뜩 낸 뒤 문을 닫고 아무 일도 없던 척을 했다. 캐리어를 열어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물어보았다. 내 나이를 듣고 혜민이가 놀란 눈을 하고 말했다. 네? 몇 살이요? 제 또래인 줄 알았는데. 언니 동안이네요. 이 잠깐의 대화 전부가 너무나도 한국스러워서 나는 웃으면서 또 한 번 안심했다. 아직 한국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약속한 시간이 되어 호텔 로비에서 우리 넷은 만났다. 호텔에서 시내까지는 1시간 정도로 생각보다 거리가 꽤 있어서 공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이동하기로 했다. 우한의 모든 것은 생각 밖이었다. 지하철은 깨끗했고 한국인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겉모습을 한 승객들로 가득했다. 내 모습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다는 점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도착한 시내의 풍경 또한 놀라웠다. 보이는 건물들 대부분이 유럽식으로 화려하고 반듯했다. 걸어가면서 본 중국식 재래시장의 모습이나 오밤중에 공원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체조하는 할머니들의 모습만 아니었다면 아주 잠시나마 유럽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홍콩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과 맥주를 시킨 뒤 여기까지 잘 찾아온 서로를 칭찬하며 건배했다. 적당한 자기 소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치고 꽤 즐겁게 떠들고 웃었다. 어떤 문장을 듣고 함께 웃을 수 있다는 당연한 일이 외국에서는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구나.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아무 접점이 없을 사람들이 각자에게 전부 낯선 곳에 와서 본인들을 설명하고 서로의 세계가 잠시나마 합쳐지는 이런 일이 여행 도중에 자주 발생하겠구나 하고 예감했다. 나는 그럼 사람들에게 내 세계의 어떤 부분을 보여줘야 하는 걸까. 우울하고 불안에 가득 찬 부분은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밝은 곳을 보려고 떠나오는 것이 여행인데 그곳에서 어두운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식사를 마치자 벌써 오후 9시였다. 내일 오전의 비행을 위해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다시 공항으로 이동했다. 공항이니 당연히 택시가 많을 거고 호텔까지 도착하는 것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났다. 택시 승강장에 있던 많은 택시들은 가져온 호텔 명함에 있는 주소를 보여주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하나같이 거절하는 듯한 의사를 보였다. 대체 왜 안 가는 거지? 우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 넘도록 거절당한 뒤 우리는 두리번거리다가 중국 경찰을 발견했다. 경찰에게 호텔 명함을 다시 보여주며 대략의 사정을 얘기하자 호텔에 전화를 걸어주는 듯했다. 셔틀버스가 곧 올 거라고 얘기해줬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10분 정도 기다리자 아까 호박마차처럼 보이던 그 차가 왔다. 반가웠으므로 아직 호박마차였으나 너무 피곤하고 긴장한 탓에 아까 본 것에 비해 호박이 쭈구렁탱이처럼 보였다.    

 

쭈구렁탱이 호박마차는 어쨌든 12시가 되기 전에 우리를 호텔로 데려다줬다. 호텔 로비에서 우리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고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혜민이와 나는 씻은 뒤 곧바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잠들기 전에 어렴풋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행기 안에서 불안에 떨면서 실패를 예감하고 가짜로 치려고 했던 우한에서의 여정이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것. 그럼 런던은? 이 행운이 런던까지 이어질까? 파리까지는 아직 8,904 km가 남았다. 여전히 화장실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났지만 오늘 만난 행운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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