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a Jun 17. 2019

6. 운에도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다면

이렇게 파리에 오자마자 죽는구나. 시계를 보니 화장실에 기어 들어온 지 벌써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그 말은 변기를 붙잡고 토를 하기 시작하고 나서도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소리였다. 진심으로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원인은 무사히 파리에 입성한 것을 자축한답시고 빈 속에 자극적인 과자들이며 와인 반 병을 털어 넣은 탓인 것 같았다. 맛있는 안주와 적당한 알코올의 조합은 하루의 끝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렇게 복잡해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토는 멈추지 않는데, 시간은 이미 밤 11시를 넘은 데다가 불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으며 파리에 도와달라고 연락할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원래 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운에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운으로 결정되는 불행과 행복은 대개 엇비슷한 양이라고. 그래서 어느 정도의 불행이 오고 난 뒤에는 어느 정도의 행복도 온다고. 밀물과 썰물처럼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서 명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어쨌든 오는 거라고. 그래서 어떤 행복이나 불행의 순간에도 그 반대의 것이 찾아올 순간을 염두하곤 했다.


역시 그 법칙은 작년에 깨진 지 오래야 라고 파리의 아파트 화장실 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울면서 생각했다. 작년에 찾아온 불행들은 너무 무거워서 그만큼의 행복이 오는 건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무리라고 진작에 체념하긴 했으니까. 그렇지만 파리까지 왔는데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신 부탁해보기로 했다. 만약에 그만 아프게 해 주시면 성당에 나갈게요. 혹시나 그동안 안 가서 벌주시는 거라면 갈 테니까 용서해 주세요. 거짓말 같게도 바로 그때 고통이 멈췄다.


훌쩍거리면서 간신히 샤워를 하고 캐리어를 열어 약을 꺼내 먹었다. 아픈 것은 멈췄지만 서러움은 멈추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부모님을 제외한 지인들에게 방금까지 얼마나 아팠는지 징징댔다. 저 멀리서 날아오는 걱정의 메시지들이 따뜻했다. 그때, 파리에서 누군가를 만나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손 뻗으면 금세 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 말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다행히 평소의 컨디션과 별 다를 바 없었다. 평범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건 주어지지조차 않을 뻔한 기회였다. 그러니까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바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구글에 how to meet local friends라고 검색하자 억 단위의 검색 결과가 나타났다. 그중 1페이지에 있는 정보들이 공통적으로 알려준 것 중 제일 쉬울 것 같은 건 앱을 통한 만남이었다. 앱을 깔고 프로필에 등록할 내 사진을 고르면서 한국이었으면 절대 안 했을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짓을 한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다. 


앱에서 해야 되는 일은 단순했다. 사람들이 화면에 뜬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상대방도 내가 마음에 들면 대화를 할 수 있다. 사람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내 나름의 기준을 정했다. 첫 번째, 여자만 만난다. 두 번째, 프로필 사진에 친구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한다. 세 번째, 직감을 믿는다. 그런 기준을 거쳐서 처음으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바로 미미였다. 


미미는 세 가지 기준을 다 충족하는 사람이었다. 여자였고, 프로필 사진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많은 걸 보면 적어도 골방에 숨어 경찰을 피해 다니는 범죄자는 아닐 것 같았고,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평범하게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속 장소는 번화가의 유명한 카페로 잡았다. 약속 장소로 나가기 전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약속 시간 이후 1시간 동안 연락이 없으면 경찰에 신고하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메시지도 남겨두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완전하게 모르는 사람이랑 만난다니, 그것도 파리에서.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조금은 불안했다. 미미가 나를 싫어하는 내색을 비추거나, 사실은 못된 사람이어서 상처를 받는다거나,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먹으려 드는 하는 상상을 했다. 상상은 점점 생생해졌는데 그건 불과 한 달 전까지 생생하게 겪던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많이 먹어본 맛이 상상만으로 쉽게 혀에 맴돌게 되는 것과 같았다. 울적해진 채로 지하철 역에서 내리니 마침 비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카페에 도착하자 다행히 비가 그쳤고,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자마자 미미와 눈이 마주쳤다. 수줍음을 담고 있는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말을 건네 왔다. 만나서 반가워. 내 머릿속에 있던 상상들은 바로 버려졌다. 바로 친구들에게 나는 무사할 것 같으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이후의 시간들은 즐거웠다. 미미는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파리지엔느였다. 외국인과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처음이라 긴장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영어 공부 좀 열심히 해둘 걸 하는 부질없는 후회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긴장한 것이 눈에 보였는지 미미가 차근히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자기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과 한국 음악, 그리고 작년의 한국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하고 싶은 말을 100%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미미가 말하는 것은 거의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중간에 말문이 막혀서 미안,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라고 멋쩍은 듯이 웃었을 때 갑자기 내내 웃던 얼굴이던 미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영어 못하는 거 아니야. 네가 하는 말을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너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잖아. 그리고 우리 지금 2시간째 이야기하는 중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전까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낯선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막연해서 겁이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 막연하게 불안해하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미미와의 만남에서 깨달았다.  

파리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 나게 하는 주변의 불어 소음, 직원의 강력한 추천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던 샌드위치와 커피도 막연한 불안을 확실한 행복으로 바꿔주는 데 큰 몫을 했다.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남겨두고 카페에서 나와 밖으로 조금 걷자 금세 노트르담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미미가 신이 나서 설명해 주었다. 저게 바로 노트르담 성당이야.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오는 바로 그 성당.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정말이냐고 놀란 척을 해 주면서 웃었다. 어쩌면 이건 행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채워져야 할 행복 중 하나가 오늘 온 것이라고. 

오늘 정말 즐거웠다며 작별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대한 마음속 허들이 낮아졌다. 세웠던 기준 중 하나를 취소하기로 했다. 여자만 만난다는 기준을. 그건 돌아오는 길에 센 강 근처에서 들었던 어떤 로맨틱한 선율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오늘 하루와 같은 행운이 이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하던 사람을 닮아서 그 사람의 프로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서 남자를 만난다면 이 사람으로 하는 게 좋겠어.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준을 충족하는지 살펴본 뒤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걸었다. "Hi there. :) How are you?" 10분 만에 답장이 왔다. "아, 안녕하세요. 근데 저 한국사람이에요. 이름 보니까 한국 분 같은데 맞죠?" 1시간 동안 대화한 뒤 그 사람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럼 내일 만나실래요?"


매거진의 이전글 5. 오랜만이야, 9년 만에 만난 에펠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