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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 Jul 31. 2024

추위와 찬물 (2)

맥그로드 간즈

잠이 오지 않았다. 캄캄한 거실, 여린 달빛이 아슬하게 실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 질 녘 들어온 다른 여행자는 말수가 적었다. 간단한 자기 설명처럼 말을 끝내고 책을 한 권 집어 들더니 그대로 누운 채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돌아 누운 모습이 어딘가 애석하다. 괜한 잡념이 늘어나니 먼 나라에 여행 와서 숲 속 작은 집에 누워있는 상황이 갑자기 어색하기까지 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특별한 계획은 없다. 내일도 하루 세끼와 간식을 챙겨 먹고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와 다시 잘 잠드는 것뿐이다.


아침에 다시 본 오솔길은 어제보다 더 아름다웠다. 활기찬 새소리와 함께 그곳에 억 겹이 비치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숲의 정령이 간밤에 쉬지 않고 맑은 공기를 품에 모아 내 앞에 내려놓은 듯, 누구의 숨으로도 한번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은 그런 바람이 분다. 단추를 모두 풀듯이 가슴을 크게 비워 가득 들이마신다. 간 밤, 깊이 잠 이루지 못하고 산속에서 헤매던 마음이 질 좋은 약수를 떠 마신 듯 일순간 씻겨 내린다. ’ 고맙습니다…‘ 나는 무엇의 존재에게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이것이 너무 귀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를 순수한 마음이었다.


맥그로드 간즈는 그동안 여행 중엔 먹지 못했던 국물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있는 곳이고 어디를 가든 두 뺨이 발그레한 티베트인들이 제 집을 짓고 또 장사를 하며 사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한국인 입맛에 가장 잘 맞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식당이 숙소 바로 앞에 있었다. 브런치 먹는 시간에서야 문을 열지만 그쯤이야 뭐 아침 산책을 하다 가게문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오픈 시간이 다가오면 어디선가 빈 배를 움켜쥐고 도로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테이블이 너 다섯 개뿐인 이 작은 식당에 첫 번째로 들어서려면 오픈준비로 분주한 사장님과 눈빛 교환 한번쯤 미리 해두는 것은 기본이다. ‘아시죠? 제가 아까부터 와 있었다는 거.’

이 소중한 식당에 오는 가장 큰 이유는 김치수제비와 비슷한 요리 때문인데, 이름은 뗌뚝. 한 사발 크게 나온다. 김치가 없는데 신기하게 그런 맛이 난다. 가끔은 눈가가 촉촉해지는 맛. 뗌뚝은 네팔음식인데 히말라야 설산이 코 앞에 펼쳐진 고산 지역에서 먹어 본 음식으로, 여행 중 이만큼 만족한 메뉴도 없었다. 지금도 아침 산자락을 타고 오는 차가운 공기를 쐬면 그 따뜻한 음식 생각이 절로 난다. 뗌뚝과 세트로 어울려 먹어볼 수 있는 다른 메뉴는 ‘모모’. 만두다. 외형은 우리나라 왕만두를 작게 빗다가 실패한 것처럼 생겼는데 속을 넣고 입구를 돌려 막다가 잘 다물어지지 않는 마지막을 짓이겨 이상하게 부풀어버린 모양새가 퍽 귀엽다. 김이 모락모락. 하얀 플라스틱 접시에 보잘것 없이 담겨 나와 덩그러니 내 앞에 놓이면 창 밖 굵고 장엄하게 뻗은 히말라야 산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입 쏙 넣는다. 설익은 반죽 안에 숨어있던 식자재의 꼬릿 한 냄새가 입 안에 퍼질라치면, “푸웃”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잘만 넘어가는 맛. 그리고 뗌뚝이 나온다. 식욕을 자극하는 주황빛. 나는 그 자태를 감상하다 더는 못 참고 일단 그릇째 후루룩 들이킨다. “크아-” 달궈진 그릇 탓에 입술이 얼얼해도 맛만 좋다. 숟가락을 들고 정신없이 퍼 먹다 보면 어느샌가 밑바닥에 토마토와 양파 쪼가리들만 나뒹굴고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렇게 외마디 신음 한 두 번이면 식사시간이 끝나버리고 만다. 그리곤 출렁이며 계산대로 내 속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서는 것이다. 조리하다 더워진 것인지 모를 사장님의 발그레한 두 뺨과 동시에 대조되는 진지한 표정이 더 이상 이 행복을 포화에 이르게 하면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동네는 급속도로 추워진다. 골목마다 한기가 돌기 시작하고 길에서 장사하던 아낙들은 짐을 싸 집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다. 옷가지를 판매하는 상점로를 돌아 숙소로 돌아갈 참이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맹렬한 한줄기 바람이라도 맞으면 바싹 마른 몸에 씌워진 여름 티셔츠가 보잘것 없이 나풀거렸다. 연약한 몸은 입술을 파랗게 만들고 내 옷차림을 가엽게 여긴 상점 주인들이 집으로 들어가라며 의연한 훈수를 뒀다. 그런 날씨를 잘 보여주듯 길가에 걸린 옷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상의나 외투들이었다. 제법 비싸 보이는 옷들이 즐비했다. 겁이 나서 쉽게 가격을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40루피짜리 숙소에 묵으면서 이 동네만 떠나면 버리게 될 방한용 겉옷을 사 입어야 하는 처지라니. 한숨이 나왔다 - 하얀 모양을 그리면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저렴해 보이는 옷들만 골라 가격을 물어봤고 그중에 큰 원단에 구멍만 뚫어놓은 케이프가 가장 쌌다. 그래도 500루피. 내가 어깨를 감싸 안고 덜덜 떨며 네고를 청하니 선심 쓰듯 100루피를 깎아줬다. 그 이상 흥정할 수 있었지만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어버렸고 바람이 찼다.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주세요.”


숙소로 들어서는 골목에 상점들이 간판불을 모두 내렸고 칠흑 같은 어두움이 내려앉아 있었다. 방금 전에 산 케이프를 머리에 아무렇게나 끼워 넣고 앞이 돌아간 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저 앞에 어느 신사로 들어가는 초입이 점점 더 까맣게 작아지며 모아지고 있었다. 무슨 노래라도 불러볼까 싶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생각이 굳어서 알 수 없는 멜로디만 새어 나왔다. 그래도 그게 뭐라고 위안이 되었다. 내 몸을 낮게 울리고 있는 그 작은 진동이. 종종걸음으로 숙소에 오르는 돌계단 앞에 다다르자 저 위 현관문 앞에 작은 호롱불이 덩그러니 떠있다. 주위로 까만 그림자를 품은 나무빛 바람이 소용돌이친다. 그 거리가 그렇게도 길어 보였다. ‘단숨에 가겠어.’ 나는 숨을 참고 짙은 돌계단 위를 달렸다.

쫓아오는 검은 바람을 피해 숙소에 들어서자 주인 할아버지가 묻는다. “더운물 필요해?”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사이 새로 체크인한 여행자가 두 명이 늘어 있었다. 처음 본 얼굴임에도 사람이 반가워 나도 모르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온기에 케이프가 저절로 벗겨졌다. 차가웠던 손 발이 녹아내렸다.


언제 두고 가셨는지 욕실 앞에 작은 물동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만져보니 따뜻한 물이었다. 그러나 샤워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안돼. 한 동이로 끝내.” 모두들 그만큼으로 샤워를 끝낸다는 것이다. 더운물이 나오지 않는 숙소라서  할아버지는 요청이 있으면 샤워물을 끓여서 제공하고 있었다. 40루피라는 금액은 내 입을 스스로 잘 다물게 했다. 욕실에서는 계산이 필요했다. 맨 몸으로 들어 선 욕실은 한겨울처럼 추워서 5분 이상을 단념하게 했다. ‘음 우선.. 머리를 물로 적시자. 그 물이 몸을 타고 흐르겠지. 그리고 바로 몸에 비누를 바르는 거야. 그다음 샴푸를 하고 물을 머리부터 끼얹어서 발까지 한 번에 씻는 거다!’ 나는 야심 찼다. 양칫물을 남겨놓지 않고 다 쓰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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