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그로드 간즈
나는 추위를 잘 탄다. 한여름에도 더운물로 씻는다. 영하의 날이면 여지없이 입술이 파래지고 학창 시절엔 교복 밑으로 두꺼운 타이즈를 두 벌 겹쳐 신었으며 등굣길 눈바람이 때로는 가혹하게 느껴졌었다. 맥그로드 간즈는 시원해서 걷기 좋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갔다. 더위는 제법 쉬웠던 나에게도 인도의 여름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앞 골목을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좁은 길이 있는데 그 길 끝에 있는 건물이에요."
하룻밤에 40루피 하는 숙소가 있다는 거다. 자주 가던 식당에서 만난 어느 여행자의 말이었다. 고급 정보라도 넘기는 듯 의기양양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한화로 환산하면 겨우 240원 남짓한 액수. 굳이 그렇게까지 저렴한 숙소에 갈 필요는 없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오다가다 본 그 오솔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얼마 걷지 않아 직감적으로 다가 오는 길목 앞에 서니 눈앞에 크고 작은 돌멩이를 쌓아 만든 좁고 긴 돌계단이 펼쳐졌다. 그 계단은 갈수록 더 좁아져서 그 끝이 더 멀게 느껴지도록 했다. 그 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람이 씨실과 날실을 이뤄 장대하고 푸른 나무들 사이를 꿰듯이 흐르고 있었다. 쏴-아-아- 넓은 잎 무리가 내는 거대한 소리 때문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아름다움에 무한히 겸손해졌다. 계단 끝 작은 문에 이르기까지 나는 발소리를 낮추며 걸었다. 천천히. 돌계단 틈 실낱같은 지평 위 연둣빛 이끼가 발 밑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보면서.
오래되어 보이는 문고리. 간판도 초인종도 없다. 이곳이 가정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스친다. ”어쩌지“ 창문 너머로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배낭끈이 어깨를 짓누른다. 빨리 내던지고 싶었지만 주인이 확인되지 않은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그 옆으로 세워진 거대한 첫 번째 나무에 기대어 앉아 방금 전 내가 오른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울창한 숲 길이었다. 뒤쪽에 산으로 이어지는 듯한 오솔길이 보였고 그 길목에 있는 이 건물은 시옷모양의 붉은 지붕을 얹은 2층짜리 목조주택이었다. 오래된 외벽 페인트가 듬성듬성 뜯겨나갔지만 자세히 훑어보니 제법 튼튼하게 지은 집이었다. 그런 집에 살고 싶다고 내내 생각했었다. 내가 미취학부터 초등 저학년까지 살았던 집도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아래층에 세 들어 살았었다. 그 집에서 소소한 살림을 꾸렸던 나의 부모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 그리고 내 동생. 우리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단란했다. 그 시절 내가 그렸던 집들은 어디서든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2층집을 모방하고 있었다. 지붕은 쌔빨강색. 하지만 그런 집이 온전히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된 일은 지금까지도 없다. 그래서 아마 가슴에 품어져 있었는지 모른다. 그 집을 닮은 숙소일까. 나는 생각했다. 주변엔 바람소리뿐이었다. 새소리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뭔가에 홀렸는지 문을 안쪽으로 밀어보았다. 끼-익. 문이 열렸다. 당황했지만 안에 누군가 있다면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계세요?“ 그리고 안쪽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숙박하고 싶습니다! “
거실공간에 1인용 침대 대여섯 개가 듬성듬성 놓여있다. 나무로 만든 침대는 낡아 보였지만 만듦새가 좋았다. 어깨가 뻐근했고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말끔히 치워진 빈 침대를 보니 당장에 눕고 싶은 마음부터 들었다. 구석에 놓인 침대 옆으로 어느 여행자의 것으로 보이는 배낭이 놓여 있었다. ‘다행이다. 숙소가 맞는 거 같아’ 그때 2층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부는 짙은 오크빛 나무벽이 둘러져 있었다. 멋진 집이었다. 어디선가 옅은 세탁세제 냄새가 났다. 청결한 느낌. 마음에 들었다. 발소리가 내려오는 계단에 다다르는가 싶던 순간,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한 할아버지 한 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표정 없이. 미세하게 쳐진 입꼬리에서 소란스럽게 사람을 부른 이에 대한 신경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숙박하려고?” 대답은 듣지 않고 2층으로 다시 올라간 그가 잠시 후 체크인 명부를 들고 내려와 내게 향한다. 내 손이 가닿기 전에 옆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킨 후 다시 홀연히 사라지는 할아버지. 무심하다. 친절까지는 바라지도 말라는 듯이.
옮긴 숙소는 실내 난방이 되지 않았고 얇은 담요 한 장 주는 게 다였다. 나는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꺼내 두께감이 있는 옷들을 추렸다. 전부 반팔 티셔츠. 더 많이 입기 위해 원단 두께를 세심히 만져보고 얇은 것부터 두꺼운 것까지 순서를 정했다. ‘그래, 이걸 먼저 입고 다음에 이걸 입는 거야. 아니 아니, 이게 좀 더 작아 보이는데 그럼 이것부터..’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신중하게 티셔츠 6장을 겹쳐 입었다. 맨 살을 드러낸 두 팔은 아무렇게나 옆구리에 끼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일은 쇼핑을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