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경비원의 일기>는 유통 중단되었습니다. 출판사 현대문학은 신속히 판단을 내렸네요. 은행나무 출판사는 아직 머뭇거리는 또는 신중을 기하는 중입니다. 두 달 전에 출간된 <브레이브 뉴 휴먼>은 아직 신간이니 3년 전(2021년) 출간된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같은 처리 속도를 갖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출판사가 영리기업이라는 사실을 잠깐잠깐 잊습니다.
현대문학은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에 작가의 요청에 따라 <야간 경비원의 일기>를 판매 중단한다는 기본 사항만을 공지했습니다. 여기에 ‘이유도 명시하지 않은 채 판매 중단’을 밝힌 출판사에게 실망했다는 댓글들이 붙습니다. 은행나무는 상대적으로 긴 입장문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웹사이트에서는 관련 소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대다수의 댓글은 ‘그게 사과냐!’입니다. 입장문의 내용은 ‘사과와 함께 후속조치를 작가와 협의 중이며 창작 윤리 문제가 공론화되기를 바란다’입니다. 은행나무는 공론화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불매운동 운운하는 독자들의 압박을 견딜까요?
은행나무 출판사 웹사이트의 공지사항 목록들을 살피다 2017년 4월 7일자 “쓰쓰이 야스타카 망언에 관한 은행나무 출판사 공식입장”이라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쓰쓰이 야스타카는 영화화되기도 했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쓴 작가더군요. 작가가 4월 6일 개인 트위터에 ‘위안부 소녀상에 관한 망언’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은행나무는 즉시 작가와 계약을 해지하고 이전에 출판한 작가의 책을 바로 판매 중지시킵니다. ‘한일관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개인적인 시각에 실망’했다는 변과 함께요.(출처: http://ehbook.co.kr/25110) 빛과 같은 속도의 처리이지요?
정지돈 작가의 경우 재현의 윤리가 문제이고, 쓰쓰이 작가의 경우는 역사를 보는 시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윤리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바뀌지만 당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넘어서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입니다. 넘기 어렵다는 것은 결국 겪어야만 끝나는 고난이 그들 앞에 놓여있다는 뜻이지요. 겪어야 한다면 조금은 다른 방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가 터지고 신속한 작가와 출판사의 사과, 유통 중단이라는 정해진 도식말고, 결과가 혹여 같을지언정 문제와 사과 사이에 사과와 판매중단 사이에 여러 겹들의 논의와 대결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정지돈 사태와 관련하여 신문들은 똑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기사를 내보냅니다. 사실의 적시에 있어서도 피해 주장 여성의 신상과 관련해서 2차 재현의 윤리 문제가 발생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합니다. 사태와 관련하여 <채널 예스>의 김영훈 칼럼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는 읽어볼 만합니다. 이 글에서 김영훈은 ‘재현의 윤리’라는 문제가 붉어질 때마다 변함없는 출판사의 대응을 생각해보자고 말합니다. 편집자 출신의 필자는 출판사는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문하고 성찰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출판사의 바람과 달리, 출판사의 일련의 결정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만족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중에게는 미온적 태도로 가해자를 옹호한다고 비난받았고, 작가에게는 아무런 보호를 제공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불매운동으로 출판사를 압박하고,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는 무너졌다.
(출처: 채널예스 [김영훈의 잃어버린 편집을 찾아서] 재현의 윤리와 출판사의 책임. 김영훈 칼럼 – 8화)
은행나무 출판사는 이번에는 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까요?
정지돈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나보코프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소설쓰기의 목적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이번 사태를 정지돈 작가는 어떻게 겪어나갈까요.
나보코프의 인용이었어요. 진지한 소설은 인물과 인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이요. 현대예술에서는 자연스러운 태도예요. 모든 현대예술의 수많은 장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독해에, 쉽게 말하면 반기를 들어요. 하지만 때로 현대의 독자들이 그런 소설에 불쾌감을 표현하거나 화를 낸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요. 책 읽는 사람들은 소수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회문제에도 밝고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는데, 작은 것만 달라져도 화를 내는 모습을 맞닥뜨릴 때 말이에요. 읽는 사람에게 제동을 건다는 오래된 방식이 오히려 드물어진 걸까요. 요즘은 모든 콘텐츠가 소비자 중심이기에 '니즈'를 충족해야한다는 기대가 있어서인지. (출처: grds와의 인터뷰(2023년5월16일자)
데일리안 기사에 따르면 피해 주장 여성 역시 공론화와 각오를 밝히고 있습니다.
“정 작가도 저도 공론장에 서있고, 각자의 입장을 밝히며 창작 윤리와 사생활 도용의 충돌, 차용 인물에 관한 재현 윤리, 아카이브 작업의 링크 실패 등에 관한 땔감이 될 각오를 마쳤다”라며 더 활발한 논의가 필요함을 지적했다. (출처: 내 이야기가 소설에?…반복되는 ‘사생활 침해’ 논란, 방법 없나 [D:이슈], 장수정 기자)
작가와 출판사, 피해 주장 당사자까지 ‘논의’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데요. 유야무야 사라지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