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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an 28. 2021

신혼, 요리 콤플렉스의 시작

딸 둘 엄마의 요리 컴플렉스_제1장 이토록 주관적인 요리실력

어릴적 내 꿈은 소박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시절에는 세계적인 콩쿨 무대에서 연주를 하거나 수상하고, 열혈 학생이던 어느 날엔 영국 옥스퍼드 대학쯤이나 되는 곳에서 캠퍼스를 누비는 꿈을 꿨다. 소설가를 꿈꿀 때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들의 기사를 해마다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페미니스트 기질도 다분했다. 자아가 생긴 십대엔 맞벌이를 하는 엄마만 주방일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나는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면 고추 떨어진다"는 할머니에게 곧잘 대들었다. 그리고 화풀이라도 하듯 당시 겨우 유치원생인 남동생에겐 "너는 커서 여자와 똑같이 가사분담을 해라"고 훈계했다. 된장찌개 한번 직접 끓여보지 않은 아빠와는 가사분담에 관해 3시간 동안 논쟁을 벌였었다.


그러나 거대한 꿈도 이러한 페미니스트의 기질도 현실의 장벽 앞에선 무력했다. 20대의 나는 소규모 회사의 취업에서조차 고배를 마시기 일쑤였고, 기껏 들어간 회사에서는 마감 때만 되면 상사에게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회사 분위기상 그 쓴소리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그런 회사 분위기에서 10대의 내가 꿈꾸던 나는 없었다.


치열하면 될까 싶어 발버둥쳤지만 역설적이게도 치열한 삶을 추구할수록 안온함이 그리웠고, 경쟁을 해야할수록 평화로운 관계가 좋아졌다. 그즈음 나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개인의 이상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극단의 이상과 현실을 오가며 내게 남은 것은 '극심한 피로'였다. 내 나이는 이미 20대를 훌쩍 지나 30대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타협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커리어우먼이 아닌 하우스 와이프로 사회가 아닌 가정에서 한 남자의 여자가 되는 일. 집안에 틀여 박혀 앞치마를 두른 채 시도 때도 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고 또 닦는 일.  종종거리며 주방에서 썰고, 끌이고, 지지는 일.  가족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무한 반복되는 업무를 살아내는 일.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는 조용한 긴장 속에서 안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일을 하기로.     


2013년 4월 20일. 그리하여 나는 결혼과 함께 전업 주부가 됐다. 친구들은 말했다. "네가 집에 들어앉아 살림이란 걸 할 줄은 몰랐어!" 내가 SNS에 새로 익힌 레시피로 한 요리를 소개하면 칭찬보단 "많이 변했네. 네가 요리 사진을 올릴 줄이야.."라는 댓글이 달렸다. 사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좋아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내 일상에서 중요도가 높은 일이었다. 요리 사진 업로드는 그저 내가 하는 일의 일부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일이었다.       


아침밥을 안하는 새댁도 많다지만, 일하다 순간 전업주부가 된 내게 아침밥을 안차리는 건 업무방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8시쯤 일어나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김이 보슬거리는 상태로 식탁에 올렸다. 그런데 식탁에 앉은 남편의 반응은 차가웠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너무 맛이 없어!", "먹을 게 없어!"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남편은 아침을 준비한 내 정성은 아는지 모르는지 몇 숟갈 안 뜨고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아무리 맛이 없다고 해도 저건 예의가 아닌데...정말 그 정도로 맛이 없나?'

신혼 초 경험 부족에서 누구나 겪을만한 일이라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고, 상처가 깊었다. 혹여 맘을 달래려 지인들에게 서러움을 털어놓으면 지인들은 "너네 남편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냐?!", "너네 시어머니가 음식을 너무 잘하셔서 그래!", "너네 신랑 입이 까탈스러워!", 이렇게 응해주다가도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나면 "요리 좀 늘었니?", "네가 해온 음식 좀 먹어보자"라며 '남편에게 까이는 요리실력'을 검증해보고 싶은 눈치였다.     


결혼 전, 요리에 대해서 나는 나름 자신만만했다. 1900년대생 조모에게서 구시대적인 가정교육을 받아온 나는 10살 무렵에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 이후로 이내 웬만한 가벼운 요리는 해먹을 줄 알게 됐다. 친구를 집에 초대하면 음식 만들기 놀이를 하며 놀 정도로 요리는 내게 먼 일이 아니었다.     


가난한 유학생 시절엔 그 자신감이 빛을 발했다. 전 주에 받은 주급으로 그 다음주를 버티던 내가 엥겔지수를 낮추기 위해서 한 일은 주말에 집 앞 한인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 와 일주일치를 요리해두는 것이었다. 한 가지 재료도 조리법을 달리하면 다양한 요리가 됐다.나는 소량의 재료로 부족함 없는 한 끼를 마련하는데 자신이 있었다. 함께 사용하는 주방 냉장고에 반찬을 쟁여두면 주인아저씨는 내 반찬을 몰래 드시고, 간혹 그것을 내게 들키기라도 하면 "맛있는데?" "요리실력 좋아!" 하셨다.     


나는 하물며 요리를 즐기기까지 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이벤트로 부하직원들에게 도시락을 싸다줬다. 요리를 좋아한 것인지, 마음을 주는 것을 좋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도시락 이벤트는 직장 내 경직된 관계를 영글게 했다.  


자취를 하면서는 회사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밥 값을 줄이려는 것은 핑계였고, 아기자기한 도시락에 밥과 반찬을 소담하게 담고, 점심이 되어 다시 그것들을 마주하는 행위를 즐겼던 것 같다.  그러니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다. 결혼 후 내가 극심한 요리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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