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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욱 May 17. 2021

성냥팔이 소녀의 부활

UN팔각성냥을 파는 소녀

종이에 펜, 마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인지 모든 모임이 취소됐다. 집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 먹고 이쑤시개를 찾아 거실 수납장을 뒤졌다. 선반 구석에 뜯지 않은 UN팔각성냥이 보였다. 포장을 뜯고 성냥개비를 뾰족하게 잘라 이를 쑤셨다.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있으니 추억이 피어났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찌질한 동창들과의 술자리가 이어졌지만 흥이 나지 않아 먼저 일어났다. 전철역에서 내려 집에 가는 길이었다. 종소리가 나더니 피에로 복장을 한 어떤 소녀가 UN팔각성냥을 담은 바구니를 안고 나타났다. 소녀는 부러진 성냥개비처럼 삐딱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타버린 성냥개비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소녀는 고가차도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바구니에 가득한 UN팔각성냥을 팔았다. 술에 취해 건너편 빌딩 광고판을 보고 착각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위험해요. 내려오세요.”

  “세계 평화기금 마련을 위한 성냥 사세요.”

  “UN이 세계평화를 위해 일을 하긴 하나요?”

  “얼어 죽겠어요, 하나만 사주세요.”

  소녀는 순간적으로 다가와 UN팔각성냥을 나에게 건넸다. 술에 취해 헛것을 본 것 같아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뿜었다. 

  “성냥을 사면 진짜 평화가 이루어지나요?”

  “성냥으로 불을 밝혀 온정을 나누세요.”

  어렸을 적 UN팔각성냥 통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붉은 성냥 머리를 보면 긴장되었다. 그곳에 불똥이 튀면 폭탄처럼 불이 솟아오르기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UN팔각성냥 하나씩은 있었다. 석유난로 심지에 불을 붙일 때 귀를 후빌 때 특히 할아버지가 집에서 담뱃불을 붙일 때 탁, 하고 성냥을 그면 치익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할아버지는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담배를 빨아 불을 붙이고 연기를 성냥에 내 뿜으며 흔들었다. 성냥은 허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죽었다. 시커멓게 구부러진 성냥 머리가 가냘프게 달린 모습이 숙연해 보였다. 그렇게 위험하고 흔했던 성냥이 세계평화를 위한 불씨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성냥의 황린에 중독됐어요.”

  “빨리 팔고 집에 가서 쉬세요.”

  추위에 떠는 소녀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신용카드는 안 되고 가진 현금으로는 UN팔각성냥 한 통밖에 살 수 없었다. 

  올해도 성냥팔이 소녀가 나왔을지 몰라 전철역 고가 밑으로 갔다. UN팔각성냥을 샀는데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고 단단히 따질 작정이었다. 그곳엔 구세군 냄비가 나와 있었고 피에로 복장을 한 어느 소녀가 구세군 옆에서 종을 울리고 있었다. 성냥팔이 소녀를 기다리며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소녀가 UN팔각성냥을 가지고 나타난다면 전부 사서 세상에 불을 지를 것이다. 그러면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말끔하게 사라질 것 같다. 정월 대보름에 쥐와 해충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불을 놓듯이 말이다. 이 어려운 시절도 성냥불처럼 화르르 피워 올랐다가 스르륵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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